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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게 하기
『철도원 』삼대의 친절한 읽기 안내서, 『철도원 삼대와 인천 걷기』
양재훈 (문학평론가)
얼마 전 재미있는 영상을 보았다.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는 코미디 시리즈였는데, 외국인에게 한국인처럼 보이는 법을 가르치는 내용이었다. 자판기 커피를 뽑을 때는 커피가 나오는 동안 종이컵을 미리 잡고 있어라,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조리할 때는 그 앞을 떠나지 말고 타이머를 보고 있다가 3초 남았을 때 음식을 꺼내라, 버스정류장에서 자신이 타지 않는 버스가 올 때는 반드시 딴청을 피워 그 버스를 타지 않을 것을 온몸으로 알려라, 녹색 신호등을 ‘초록불’이라 부르지 말고 ‘파란불’이라고 불러라 등.
이 코미디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사회와 구별되는 공동체의 존재 방식에 대한 통찰이다. 지젝에 따르면 성문법을 기초로 세워지는 ‘사회’와 달리 공동체의 기저에는 불문율이 있다.1) 사회 구성원이 되는 것은 명문화된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려면 누구도 말하지 않는 해당 공동체의 불문율을 체득해야만 한다. 누가 봐도 초록색인 것을 ‘파란불’이라고 말하는 데에서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만이 한국인 공동체에 속할 수 있다. 나아가 이 불문율은 명시적 규칙을 어겨야 하는 상황을 규정한다는 점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위의 코미디가 말하는 대로, ‘당기시오’, 또는 ‘고정문’이라 표지된 문을 모두가 밀어 여는 것처럼. 새로운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일의 지난함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외부자의 눈으로는 명시적 규칙과 누구도 규칙을 지키지 않는 상황 사이의 긴장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명문화되지 않은 규칙의 체화 정도에 따라 공동체의 내/외부가 결정된다는 것은 ‘이웃’(other)의 의미가 지니는 긴장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이 긴장을 잘 보여주는 ‘짤’이 있다. 4컷 만화의 형태로 그려진 이 ‘짤’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로 시작한다. 그러자 누군가가 손을 들고 질문한다. “그렇다면 이교도, 동성애자, 원수, 악마 숭배자들은 때려죽여도 되는 것입니까?” 말문이 막힌 예수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생각한다. ‘지금까지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지?’
예수와 질문자의 입장 차이는 이웃이 누구냐에 관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질문자에게 이웃은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마을 공동체의 일원, 누구보다도 친숙한 인물을 가리킨다. 비정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그리워하는 고향의 인심을 간직한 인물이 여기에 속한다. 한데 그러한 고향이란 오직 도시인들에게만 사후적으로 발견되는 것임을 차치하더라도, 그처럼 친숙함으로 충만한 공동체는 외부자들에 대한 배제를 통해서만 유지된다. 이 친숙함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더 낯설게 함으로써만 유지되는 것이다.
반면 예수에게 이웃은 친숙한 존재가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Love others’로 영역된다. 이때의 이웃은 ‘다른 자’를 말한다. 동일자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 동일성을 지키기 위해 배제해 버려야 하는 존재가 이웃이다. 이웃은 내가 속해 있는 세계의 질서에 포함되지 않은 자, 그 질서에 길들여진 ‘내부자들’의 눈에는 너무나도 낯설어서 끝내 모르고 싶은 존재, 그래서 지근거리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애써 외면해야만 나의 일상을 지킬 수 있는 대상이다.
그렇다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무엇보다 문학, 특히 소설에서 가장 잘 실행되어 온 셈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소설의 중요성이 “나 자신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주어진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여–타인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 2) 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소설은 불가해한 낯선 인물들의 삶이 나 자신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너무나도 친숙해서 의심해 본 적 없는 자신의 삶과 사고 방식에 대한 낯선 거리감을, 그리고 너무나도 낯설어서 불가해하던 이웃과의 불안한 대면을 강제한다.
철도원 삼대와 인천걷기, 다인아트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는 이러한 역할에 충실한 소설이다. 이 작품은 너무나도 낯익어서 오히려 낯설어진 대상인 근대 한국의 노동 문제를 소환한다. 우리는 먼저 불법으로 해고된 노동자 이진오의 고공농성 이야기를 만난다. 2000년대 들어 우리는 늘상 이진오들에 대해 들어 왔지만, 너무 자주 들어 온 탓에 오히려 우리의 일상적 관심 밖으로 밀어내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달라진 노동 환경 속에서 급격하게 소외되어 온 해고노동자들은 분명 현재 우리 사회가 바깥으로 밀어내 버린 대상이자 현재 한국 사회의 중핵을 규정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나아가 황석영은 이진오의 가계를 통해 근대 이후 한국 사회의 성장 이면에 끊임없이 배제되고 억압되어 온 노동의 문제를 추적해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철도원 삼대』는 근대적 노동의 발생과 변천, 그리고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종언까지를 담아내었다. 이로써 우리는 한국 근대의 기원과 최후의 지점에서 각각 당대를 대표하는 주체의 형성과정을 그려낸 가족사 소설을 갖게 되었다. 염상섭의 『삼대』가 한국 근대적 주체의 첫 표정을 담은 소설이라면,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는 그 마지막 뒷모습을 담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장대한 서사를 지닌 작품이다 보니 가볍게 읽어내기는 어려울 수 있다. 만약 이 작품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소설의 장면 장면을 구성하고 있는 역사적, 장소적 배경들에 대해 입체적으로 알고 있지 못해서일 것이다. 한국사의 중요한 역사적 장면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나의 친숙한 일상적 경험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철도원 삼대와 인천 걷기』는 그 거리감을 메우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될 듯하다. 이 책은 ‘답사’라는 형식을 통해 『철도원 삼대』라는 대작을 제대로 읽기 위해 필요한 배경지식들을 가장 입체적인 방법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철도원 삼대』를 향한 가장 좋은 입구라 해도 좋겠다.
더욱이 이 책은 입구만을 제공하지 않는다. 『철도원 삼대』 읽기를 여행에 비유한다면, 『철도원 삼대와 인천 걷기』는 등장인물들의 역사적 위치와 가계도,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가 된 철도와 근대 풍속에 관련된 여러 시 작품과 그림들을 통해 짧지 않은 여행 과정에 필요한 충실한 가이드와 휴식처들을 마련해 두고 있다. 내게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2부에 실린 조성면과 김경은의 글이었는데, 각자 다른 관점에서 『철도원 삼대』를 깊이 읽어내고 있었다. 끝으로 3부에 수록된 최원식과 황석영의 대담은 황석영과 『철도원 삼대』의 문학사적 위치를 규명함으로써 말하자면 출구 역할을 한다.
『철도원 삼대와 인천 걷기』는 『철도원 삼대』를 향한 입구와 가이드, 쉼터, 그리고 출구를 두루 갖춘 가장 훌륭한 안내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중핵을 규정하는 가장 낯선 존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나게 하는 작품을, 가장 친숙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경험이다.
1) 슬라보예 지젝,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박정수 옮김, 인간사랑, 2002, 77-81쪽.
2) 마사 누스바움,『시적 정의』, 박용준 옮김, 궁리출판, 2013, 32쪽.
양재훈 (梁宰熏, Yang Jae hun)
201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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