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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절대 너의 잘못이 아니다

<영화 경아의 딸>

조지훈 (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

1990년대와 2000년대 할리우드를 주름잡았던 한 거물 프로듀서가 있었다. 이름은 하비 와인스타인. 그가 직간접적으로 제작한 영화는 300편이 넘는다. 그저 그런 영화들이 아니라 <펄프 픽션>, <굿 윌 헌팅>, <반지의 제왕>, <시카고>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그의 영화들은 비평가와 관객 모두에게서 환대받았고, 그는 정글과도 같은 할리우드 업계에서 말 그대로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2017년 10월, 뉴욕 타임스는 그의 화려한 경력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추악한 실상을 폭로했다. 30년간 100명이 넘는 여배우에게 성범죄를 저질러 왔던 것이다. 진실이 폭로되자 그동안 숨죽여 살아왔던 여성들은 ‘Me Too 나도 고발한다’며 SNS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투 운동’은 이렇게 태어났다. 약 4개월 후에는 한국에서도 시작되었다. 2018년 1월 29일 서지현 검사의 인터뷰로 촉발된 한국의 미투 운동은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오랫동안 침묵해온 피해 여성들은 용기를 내 입을 열기 시작했고 우리 일상 곳곳에 은폐되어있던 성폭력의 실상은 그 민낯을 드러냈다.

남성들은 자신의 과거와 전 여친에게 했던 행동을 돌아보기 시작했고, 그동안 더러워서, 말해봐야 변하는 것도 없고, 결국 나만 피해를 보니까 등등 여러 이유로 드러낼 수 없었던 피해 여성들의 분노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미투 운동은 인류역사상 어떤 사회 운동보다 빠른 속도로 세상을 바꾸어 놓았고, 그 여파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사진제공: 인디스토리)

미투 운동 이후 대부분의 문화예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영화계에도 혁명적 변화들이 시작되었다. 성폭력에 연루된 영화인들이 업계에서 퇴출되는 일이 시작되었고, 남성 중심의 현장에서 억눌려 있었던 여성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재생산되면서 고착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서사는 전면적인 재평가 대상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여성 인물과 여성 서사를 가진 영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과거의 영화 속 여성들은 성폭력 앞에서 침묵하고 숨어 살았지만, 이제 여성들은 자신의 피해를 당당히 말하고,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어 가해자와 맞서 싸우며 영화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최근에는 이런 구조적인 성폭력 문제를 피해자 개인의 노력과 투쟁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서사의 영화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와 무주산골영화제에서 연달아 공개되며 화제를 일으켰고, 최근 정식 극장 개봉 후에도 호평과 함께 많은 공감을 끌어내고 있는 김정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경아의 딸>은 이런 여성영화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여성 서사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낸 대표적인 여성영화라고 할 수 있다. <경아의 딸>은 최근 들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한 성관계 동영상 유출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이 문제를 개인의 투쟁이라는 1차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시선을 엄마와의 관계로 확장시켜 피해당사자뿐 아니라 엄마의 시선을 통해 이 고통스러운 문제를 입체적으로 바라보면서, 이처럼 개인의 내면을 파괴하는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성찰케 한다.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사진제공: 인디스토리)

경아는 영화 속 엄마의 이름이다. 경아에게는 연수라는 이름의 딸이 있다. 연수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어렵게 키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이고, 이제 막 교사가 된 자랑스러운 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경아는 연수가 남자친구와 관계를 갖는 모습이 담긴 딸의 성관계 동영상을 받게 된다. 연수의 전 남친이 이별 통보에 앙심을 품고 저지른 짓이었다. 이제 영화의 이야기는 동영상 유출을 확인한 연수의 이야기와 딸의 동영상을 본 경아의 이야기, 두 갈래로 나뉘어 진행된다.

연수는 전 남친을 경찰에 고발한다. 하지만 동영상은 이미 엄마와 친구뿐 아니라 인터넷상에도 유포된 상황이다. 동영상 유출 사실이 알려질까 전전긍긍하던 연수는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이사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잠적하듯 살아간다. 피해자임에도 당당하게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이 사건의 특성상 연수가 사건 후 당면한 시간은 절망과 고통, 분노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사진제공: 인디스토리)

그러나 <경아의 딸>은 연수의 시간을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그려내지 않고, 감정의 진폭을 크게 담아내지 않는다. 연수가 고통 속에서도 씩씩하게 자신을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담아낼 뿐이다. 돌이켜 보면 연수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남친을 사랑하다 보니 동영상을 촬영했고, 둘만 간직해야 했던 동영상을 남친이 유출한 것이다. 영화는 고통을 과장하기 쉽지만 <경아의 딸>은 그 길을 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가 피해자인 연수의 시간을 다루는 시선과 방식은 그 어느 영화보다 깊고 현실적이다.

이제 경아의 이야기다. 우리는 이 영화의 제목이 ‘경아의 딸’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 영화는 딸 연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엄마인 경아의 이야기인 것이다. 어떤 엄마가 딸의 성관계 동영상을 받아들고 제정신일 수 있을까. 경아의 복잡한 심정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 여성에게 잘못을 돌리곤 한다는 점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너도 찍는 거 알고 있었다면서. 이런 상황을 겪고 있는 당사자 앞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건 말이다. 그러나 온갖 감정의 회오리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경아는 홧김에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연수에게 내뱉는다. 아마도 딸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사진제공: 인디스토리)

하지만 말은 순식간에 칼이 되어 연수를 무너뜨리고, 엄마와 딸의 관계를 박살 낸다. 잘못된 말은 이렇게 쉽게 관계를 끝장내버린다. 연수는 경아와의 연락을 끊는다. 경아가 자신의 잘못을 정확하게 깨달은 건 연수가 이사한 집을 간신히 찾아낸 후 딸로부터 분노의 외침을 듣고 난 후였다. 연수는 영화 속에서 가장 큰 분노를 전 남친이 아니라 가장 어려울 때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못한 엄마에게 표출한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사랑하는 사람이 곤경에 처한 걸 보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돕지 못할 때가 많다. 무엇을 해줘야 할지 모르고, 원하지 않는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가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연대다. 너를 이해할 수 없고, 너의 상황을 정확하게 모르고, 어떻게 도와야 할지도 잘 모르지만, 지금 너의 고통은 너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있을 것이고 너를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너를 응원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해야 한다. 그것이 최악의 시간을 겪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최선의 연대다.

미투 운동의 핵심은 ‘나도 당했다’는 단순한 폭로가 아니었다. ‘나도 피해자였고, 나도 고발하겠다’는 공감과 동조였으며, ‘그러니 혼자 외로워하지 말라. 이건 너의 잘못이 아니다’는 연대의 외침이었다. 따라서 <경아의 딸>은 단순히 성관계 동영상의 유출 문제를 다룬 사회드라마가 아니다. 살다 보면 성관계 동영상 유출 보다 더 한 일도 겪을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이다. 이 영화에 그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 경아의 노력이 없었다면 연수는 절대로 이 끔찍한 고통의 시간을 절대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아의 딸>은 엄마와 딸의 관계를 고찰한 여성 심리 드라마이자, 결국 고통을 함께 이겨낸 두 여성에 관한 성장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다면 진심을 다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건 절대 너의 잘못이 아니다.”

조지훈

조지훈 (趙志訓)

(무주산골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겸 프로그래머)

2001년부터 2012년까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숏!숏!숏!>,〈디지털삼인삼색〉프로듀서, 전주프로젝트마켓 총괄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2013년부터는 무주산골영화제 부집행위원장&프로그래머로 활동하면서, 아시아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마켓 ‘인천다큐멘터리포트’ 창립 멤버/프로듀서/집행위원, 바르샤바영화제 시니어 프로그램 어드바이저, 다큐멘터리 웹진「DOCKING」편집위원, DMZ Docs 집행위원, EIDF 예심/자문위원 등 여러 활동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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