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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정치의 상관관계

인천시립극단 <다스 오케스터>

황승경 (연극평론가)

‘정치’와 ‘예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종의 공생관계다. 예술은 저항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찬양·미화·선전·선동의 힘을 가진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순응과 대항의 갈림길에 선 예술가들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다룬 연극이 공연되었다. 인천시립극단이 6월 8일부터 12일까지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선보인 일본인 극작가 노기 모에기의 <다스 오케스터>는 나치시절 수많은 논란을 양산한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를 심도 깊게 담았다.

자의든 타의든 푸르트벵글러는 대표적인 나치부역 예술인이다. 다만, 그도 초반에는 예술을 얽매고 옥좨는 정치권력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표명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시점부터 그는 나치의 광기에 편승해 그 선봉에 선다. 연극에서는 그가 나치의 대표예술가가 되어 나치 음악회에서 지휘하고 연주하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불의에 항거하는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이하 베를린 필)에서의 그의 모습만 담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베를린 필과 푸르트벵글러는 ‘현대역사에서 예술이 정치에 이용당한 손꼽히는 사례’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데 말이다. 일부 관객에게는 일본인 작가의 연극이 마치 나치부역자의 이후 행적에 면죄부를 주는 듯해 불편할 수도 있을 듯. 이러한 맥락에서 일제강점기 35년을 감내한 우리에게 <다스 오케스터>는 여러 각도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연극

연극 <다스 오케스터>
(사진제공: 인천시립극단)

예술과 정치의 틈바구니 속 실존 예술가들의 격랑

연극 <다스 오케스터>는 지금부터 89년 전의 독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3년 1월 독일 총선에서 제2당으로 도약한 나치당 총수 히틀러가 드디어 내각의 수장에 임명된다. 실질적인 국가지도자로 절대 권력에 오른 히틀러는 두려울 것이 없다. 뮌헨에서 독일의 심장 베를린으로 근거지를 옮긴 나치당은 입맛대로 거침없는 통치를 시작한다. 극 중에는 배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없고 실명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마에스트로’, ‘선전부장’, ‘바이올린 주자’, ‘(유태인)비서’ 등으로 호칭되지만, ‘베를린필’, ‘하켄크로이츠’는 이들이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파울 요제프 괴벨스, 시몬 골드베르크, 베르타 가이스마르 등의 역사 속 실존 인물임을 증명한다.

나치는 자타가 공인하는 베를린 필의 권위를 이용해 정권의 정통성을 선전하려는 검은 마수를 뻗친다. 당시 베를린 필은 창단 51년의 순수민간관현악단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불황도 자체적으로 극복하는 저력을 보였지만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경제 대공황의 늪은 빠져나가지 못한다. 나치는 극심한 재정난을 겪는 베를린 필을 ‘정권나팔수’로 만들 속셈으로 쥐락펴락하려는데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정치의 예술관여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는 초지일관 ‘예술은 정치보다 우위’라는 신념대로 밀고 나간다. 4월, 바그너 서거 50주년을 기념한 ‘만하임 오케스트라 기금마련 콘서트’에 유태계 폴란드인 바이올리니스트 골드베르크를 협연시키고 6월에는 유태인 보이콧이 예술 영역으로 확대되면 즉시 모든 직위를 사임하겠다고 선전장관 괴벨스와 담판 짓는다. 이듬해 4월에는 괴벨스에게 공개서한까지 보내며 나치의 비인간적인 반유대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히틀러를 ‘인류의 적’으로 규정한다. 연출자 남동훈은 충돌, 동요, 반발, 고뇌, 대립 등이 복잡하게 뒤얽힌 오케스트라 내부의 갈등을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선사한다.

연극

연극 <다스 오케스터>
(사진제공: 인천시립극단)

압박 후폭풍에도 푸르트벵글러는 굴복하지 않는다. 오케스트라 내부 독일인 단원들 사이에서도 유태인 연주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따돌림과 거부움직임은 포착되지만, 푸르트벵글러는 불만 있는 단원들은 누구든 나갈 테면 나가라며 오히려 ‘배수의 진’을 친다.
다소 강압적이라 무미건조할 수 있는 지휘자의 다층적 내면은 인천시립극단 배우들의 농밀하고 섬세한 연기로 무대를 장악한다. 인천시립극단 배우들의 저력이 확인된다.

1933년 6월, 푸르트뱅글러는 유태인에 대한 보이콧이 예술 활동으로 확대된다면 즉시 모든 직위를 사임하겠다고 나치 정부의 선전장관 괴벨스와 담판을 지었고 1934년 4월에는 괴벨스에게 공개서한까지 보내며 비인간적인 반유대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히틀러를 ‘인류의 적’으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푸르트뱅글러의 해임이 거론되며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야말로 낭떠러지로 쫓기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골드베르크를 비롯한 베를린 필에서 활동한 4명의 베를린 필 주자들은 모두 해외로 망명할 수 있었다.(그의 유태인 여비서는 영국에서 지휘자 토마스 비첨의 비서가 된다. 반면, 베를린 필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빈 필하모닉오케스트라 단원 중, 1938년 오케스트라에서 독일합병으로 추방된 유태인 단원 10명은 모두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그 중 6명은 수용소에서 사망한다)

괴벨스는 푸르트벵글러에게 충성을 공개적으로 맹세하도록 요청했지만, 푸르트벵글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1935년 4월 푸르트벵글러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으로 다시 베를린 필 지휘봉을 잡는다. 히틀러는 푸르트벵글러의 콘서트를 찾았고, 푸르트벵글러는 나치 문양 하켄크로이츠 아래에서 히틀러에게 연주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연극은 여기서 막이 내린다.

연극

연극 <다스 오케스터>
(사진제공: 인천시립극단)

역사에서 찾는 오늘의 해법

<다스 오케스터>는 2019년에 초연되었지만 극작가 노기 모에기는 대학 시절이던 1990년대부터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극에 등장하는 유태인 바이올린주자 골드베르크가 1990년대에 일본에서 거주했기 때문이다. 베를린 필에서 퇴출당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골든베르크는 네덜란드령이던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순회 연주를 하던 중 일본군에 잡힌다. 설상가상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 강제수용소에서 2년 반을 보내며 온갖 고초를 겪는다. 세월이 흐른 1988년, 일본 피아니스트와 재혼한 그는 일본 클래식 음악계를 한 단계 발전시킨 유명인사가 되었다. 극작가 노기 모에기가 골드베르크의 인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할 듯하다.(골드베르크는 25살에 독일을 떠난 이후, 어떤 독일연주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이후 독일 땅은 밟지도 않았다.) 정치적 언행은 삼갔지만, 골드베르크의 일거수일투족은 정치적으로 해석되었다. 작가 노기 모에기는 이 작품 속 푸르트벵글러의 고뇌를 통해 무엇을 시사하려 했을까. 그리고 <다스 오케스터>를 관람한 일본인 관객들은 뭐라고 느낄까.

음이 모여 선율로 창조되면 ​​저 너머 인간의 고결함을 상상케 한다. 푸르트벵글러는 히틀러와 결이 다른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고결함으로 ‘예술을 위한 독일예술’을 단행하려던 그도 결국에는 가장 정치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정치와 예술은 서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현 베를린 필 상임 지휘자인 유태인 키릴 페트렌코(50)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고 “전 세계 평화에 칼을 꽂는 일”이라고 러시아를 강력하게 비난하며 희생자를 추모하는 뜻에서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을 연주했다. 베를린 필은 건물 외벽에 우크라이나 국기를 표시하며 지휘자와 뜻을 같이했다. 여전히 정치적인 행동이지만 베를린 필에 과거 모습과는 전혀 다른 박수 갈채가 쏟아진다.

황승경

황승경 (黃承景 Hwang SeungKyung)
연극평론가
평론집 ‘무한상상과 놀이의 변주(2020)’를 펴냈고 예술을 통한 성찰이 세상을 시나브로 변화시킨다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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