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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끝내 꿈꾸며 웃어버릴 것

한요나 (시인)

2022년 5월 15일 오후 3시, 예술공간 트라이보울에서 <함박마을에서 피어난 꿈>이라는 작은 드라마 콘서트가 열렸다. 공연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30여 일 동안 짐짝처럼 강제로 이주 당한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태어난 나라를 그리워하는 젊은 아샤와 그리고리”라는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다. 고려인 집단 거주지역인 인천의 함박마을과 타슈켄트를 잇는 이 이야기는 공연장에 입장하기 전부터 그 특별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공연장에 가까워질수록 러시아어처럼 들리는 낯선 언어를 쓰는 이들이 하나둘 모였기 때문이다.

공연은 짧은 연극 무대와 클래식 음악이 교차되어 진행되었다. 솔트인챔버뮤직 단원들이 무대에 자리 잡자, 영상이 재생되면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영상에는 1937년 소련 정부가 스탈린의 명령으로 한국인 17만여 명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강제 이주시킨 시절을 떠올리는 노년의 남성이 등장했다.
강제 이주는 ‘절망’과 같았고 ‘귀신처럼 넋이 나간’ 모습으로 떠나야 했다는 그의 목소리는 분노와 슬픔으로 떨렸고, 눈빛은 번쩍이고 있었다. 강제 이주에 반대하는 자는 처형당해야 했고, 모두 어쩔 수 없이 짐짝처럼 구겨져 열차에 올랐다고 한다. 그 당시 기적(汽笛) 소리가 “잊지 마요”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는 그의 말과 함께 흑백 영상 속 기차가 기적을 울렸다.
그는 제일 먼저 모국어를 잃었고, 문화를 잃었으며, 이제는 오로지 자신의 외모만이 한국인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절망감은 그 시절에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영상이 끝난 뒤, 두 배우가 무대에 올랐다. 1장 <아샤와 그리고리의 이야기>에서는 타슈켄트의 젊은 연인, 아샤와 그리고리가 등장한다. 아샤와 그리고리는 할아버지의 고향 사진을 보며, “지금 우리가 있는 곳과 비슷하지만, 다르기도 하”다고 궁금해한다. 그리고리는 언젠가 할아버지의 나라 까레야(코리아)에 가볼 것이라고 다짐한다.

연기하고 있는 배우들
연기하고 있는 배우들

연기하고 있는 배우들 이시은(아샤역), 이사야(그리고리역) (사진제공: 이연성)

배우들이 퇴장하고 베이스가 무대에 오른다. 그는 첫 번째 곡으로 러시아 전통 민요 ‘스텐카 라진’을 노래했다. 그 뒤로 이어진 두 곡은 푸쉬킨의 시를 바탕으로 작곡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이다. 하나는 알렉산드르 알랴비예프 버전의 곡, 다음은 한국어로 번역된 가사에 김효근 작곡의 곡이다. 묵직한 소리의 베이스 이연성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지막이 따라부른 푸쉬킨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서러운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왜 슬퍼하는가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기나간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 알렉산드르 푸쉬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드라마 콘서트 “함박마을에서 피어난 꿈” 공연장면
드라마 콘서트 “함박마을에서 피어난 꿈” 공연장면

드라마 콘서트 “함박마을에서 피어난 꿈” 공연장면 – Bass 이연성, 솔트인 챔버
(사진제공: 이연성)

2장 <할아버지의 나라>는 할아버지의 나라로 떠나기로 다짐하는 그리고리와 아샤의 이야기다. 그리고리는 아버지에게서, 어느 날 갑자기 기차에 실려 타슈켄트에 강제 이주되어 농장에서 일하게 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샤는 그리고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에게는 익숙한 이 땅이 할아버지에겐 평생 낯선 땅이었고, 자신에게는 할아버지의 나라가 낯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때 그리고리가 아샤에게 꽃을 주며 고백한다. “할아버지의 나라로 떠나서 너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갈거야!”

아샤가 장난스럽게 고백을 받아주며 뛰어나가는 모습을 따라 그리고리가 퇴장하는데, 이때 젊은 그리고리 역의 이사야 배우와 중후한 베이스 이연성이 서로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첫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숲이여, 그대를 축복하노라’다. 배우와 성악가가 마주 보며 천천히 자리를 바꾸는 연출은 그들을 축복하는 음악과 연결되어 더욱 가슴 뜨거운 장면을 만들어냈다. ‘숲이여, 그대를 축복하노라’의 가사처럼 성악가는 그리고리가 떠나갈 혹은 지나가고 마주칠 숲, 계곡, 밭, 산과 물, 파란 하늘과 자유를 축복한다는 듯했다.

이어서 차이코프스키의 ‘그리움을 아는 이만 아네’, 그리고 러시아의 전통 민요 ‘검은 눈동자’가 흘러나왔다. 이 중에서도 두 번째 곡 ‘그리움을 아는 이만 아네’는 괴테의 시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에서 비롯된 곡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괴로움을 알리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괴로움을 알리
나홀로 모든 기쁨에서 떠나
하늘 저쪽만 바라보네
아! 나를 아는 이 머나먼 곳에 있네
(생략)
– 괴테,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부분

3장 <함박마을에서 피어난 꿈>은 노년의 부부가 된 아샤와 그리고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인천 연수구의 ‘함박마을’에 자리를 잡고, 한국어를 배우고, 자식을 키워, 이제는 손주들을 돌보며 살아간다. 한국어에는 고려인들이 쓰지 않는 말이 많았다는 이야기나 고려인들이 주로 쓰는 함경북도 사투리 때문에 탈북민으로 오해받은 이야기를 주고 받는 아샤와 그리고리. 이때 지오르지 스비리도프의 로망스가 연주되며, 그리고리와 아샤가 퇴장한다.

애절한 현악기의 소리와 구슬프고도 맑은 관악기 소리에 웅장함을 더하는 피아노 연주는 이들이 살아온 삶이 얼마나 절절했을지 상상하게 했다. 뒤이어 스비리도프의 ‘오! 조국, 행복하고 영원한 시간이여!’라는 곡이 연주되었고, 마지막으로 보리스 포민의 ‘먼 길은 따라서’는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멜로디로 다같이 몸을 흔들며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이 무대는 중간중간 짧은 러시아어가 들릴 때마다 관객석에서 터져 나온 웃음소리로 충분히 완벽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공연은 단순히 ‘실험적’이라거나 ‘새롭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인간은 인간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삶의 본질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힘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인천 연수구에서 터진 웃음이 더 먼 곳으로 퍼지길, 함박마을에서 더 큰 꿈들이 피어나길 바란다.

한요나

한요나 (Yonah Han)

1989년 출생. 시와 SF소설을 쓴다.
시집 『연한 블루의 해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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