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8월 여름의 일이었다. 토마스 텐들러는 90세 즈음의 독일 시골 노인이다. 그 노인은 평생을 울창한 숲과 밀밭이 펼쳐진 시골 마을에서 살았다. 50세의 딸과 단둘이 생활하던 텐들러가 사망했다. 모두가 여름휴가를 떠난 병원에서 사망진단서를 발행해 줄 의사는 오행자 뿐이었다. 오행자는 1973년 파독간호사로 독일에 건너간 한국인이었다. 3차 국가고시를 마치고 막 의사가 된 신참이었고, 독립하여 개인병원을 차리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 일을 오행자가 맡았다. 그런데 일주일 뒤에 충격적인 일이 다시 발생한다. 경찰이 오행자에게 “이번엔 지난주에 죽은 노인의 딸이 자살을 한 것 같아요”라는 연락을 해 온 것이다. 오행자는 다시 그 집을 방문하여 딸인 소피아 텐들러의 사망진단서를 떼게 된다. 오행자는 그날 돌아오는 길에 차가 고장 나 하룻밤을 들판에서 보내면서 삶의 비애를 되새기게 된다. 딸, 소피아 센들러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에게 삶의 의미 자체일 수가 있다. 그런데 한쪽이 사라지면, 다른 한쪽은 ’생의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오행자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것도 갑작스럽게, 그렇기에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다’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되었다고 한다. 누구나 각자 자기 삶에 집중하여 살아간다. 하지만, 도처에는 모르는 삶들로 가득하다.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이 ‘소설이 추구하는 진실’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이야기는 백수린의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에 등장한다. 백수린은 인천 출신의 작가로,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거짓말 연습」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세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중편소설을 출간했지만, 『눈부신 안부』가 첫 장편소설이다. 등단 12년 만에 공력을 들여 집필한 장편소설이기에, 독자들의 호응도 뜨겁다. 소설에는 동인천역, 대한서림, 애관극장 등의 풍경도 등장한다. 인천 구도심의 옛 정취도 서사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소설의 쓸쓸한 정조는 앞에서 이야기한 텐들러 모녀의 죽음과 더불어 안드레 케르테스의 사진전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다. 소설의 초반부는 안드레 케르테스전 이야기로 시작한다. 안드레 케들러는 ‘엘리자베스와 나’ 연작으로 유명하다. 그는 ‘멈춤’의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포착해 내는데 탁월한 작가다. 그는 풍경과 인물을 대비시키고, 멈춤의 이미지를 통해 관객으로하여금 ’시간에 대한 감각‘을 환기시킨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 사실이 삶을 복잡하게 한다. 존재의 쓸쓸함 속에 삶의 진실이 있다는 이 감각적인 사진작가의 이미지는 ‘슬픔, 비애의 감각’으로 호명하게 한다. 안드레 케르테스의 사진은 장구한 시간 속의 순간 이미지이기에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상실의 비애’, 그리고 ‘삶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대한 이중적 감각을 되새기게 한다. 백수린의 『눈부신 안부』는 안드레 케르테스의 사진 이미지에 대한 오마주이자, 타인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향한 갈구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소설이 묵직한 서사로 채워져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소설은 흡입력 있는 서사로 독자들을 끌어당기고 있어 재미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 소설은 첫 문장은 “야자수, 나는 야자수를 떠올리고 있다.”로 시작한다. 소설의 마지막은 제주도의 야자수가 정책적으로 수입되어 심어졌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이는 소설 속에서 해미 가족의 독일 생활, 파독간호사들의 삶을 상징하는 비유로서 절묘한 효과를 자아낸다. 이 소설은 또한 탐정소설의 미스터리 기법도 활용한다. 소설은 ‘K.H.’라는 안개 속의 인물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으로 탐정소설의 형식을 취한다. 독자들도 ‘K.H’라는 존재가 소설 결말에서는 어떻게 드러날까하는 긴장감을 느끼며 소설을 따라 읽게 된다. 또 다른 소설적 긴장을 유지하는 요소는 ‘서사의 삼중구조’이다. 세 개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바깥 이야기는 ‘나’(이해미)와 ‘우재’의 애잔한 현재진행형 연애이다. 해미와 우재는 이십 대 초반 대학 문학동아리에서 만났다. 둘은 서로 가까운 친구 사이임에도 몇 번의 우연과 엇갈림으로 연인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10여 년 동안 한때는 떠나있기도 하고, 한때는 친밀한 관계에 근접하기도 한다. 우재의 배려 깊은 접근에도 해미가 거리두기를 지속하는, 둘 사이의 미묘한 긴장도 흥미롭다.
두 번째 이야기는 해미의 독일 생활 적응기이다. 1994년 12월, 도시가스 폭발 사고로 해미의 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충격으로 해미의 엄마는 해미와 동생 해나를 데리고 독일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하필 독일인 이유는 이모가 독일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 해미 엄마가 독어교육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해미의 엄마는 언니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독일에서 신학을 전공하려고 한다. 해미는 열세 살부터 열다섯 살 때까지인 1995년 겨울부터 1997년 겨울까지 2년여 동안 독일의 대학도시 G시에서 생활한다. 그때 레나와 한수와 사귀게 되고, 청소년기의 발랄한 감각으로 세상을 읽어나가는 성장기를 겪게 된다.
세 번째 서사가 이 소설의 핵심 메시지와 주제 의식과 닿아 있다. 해미는 G시에서 파독간호사 이모들을 만나게 된다. 해미의 친이모인 오행자는 의사이고, 한수의 엄마인 선자 이모는 베테랑 간호사이다. 레나의 엄마인 마리아 이모는 독일 남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이들은 모두 1973년에 독일로 건너온 ‘파독간호사들’이다. 한국에서는 파독간호사, 혹은 파독광부들을 1970년대 한국상황과 연결해 ‘가난, 희생, 애국’이라는 집단의 언어로 호명한다. 하지만 실제 G시에서 만난 파독간호사들은 ‘미래, 꿈, 희망’을 가진 개인의 언어를 가진 존재들이다. 『눈부신 안부』는 외교관이 꿈이었던 오행자가 독일 의사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과정, 김추자와 같은 멋진 가수가 되려 했던 마리아(최말숙)가 발랄하게 유럽 사회의 자유를 만끽하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 그리고 작가가 꿈이었던 임선자가 자신에게 부여된 일상을 성실히 감내하며 독일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세 사람의 인생 행로 이야기는 한국현대사의 바깥인 독일에서 펼쳐지는 한국 여성들(혹은 이주민 여성들)의 ‘끈기, 발랄, 비애’에 대한 증언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주제 의식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어구로 제시된다.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이 문장은 임선자가 1973년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쓴 일기의 첫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다. 모든 개인의 삶은 종국에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인생의 너무도 자주 쓸쓸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백수린의 『눈부신 안부』는 예정된 결론이라 할지라도, 매 순간 삶의 과정에서 해야 할 선택을 각자가 한다는 사실을 환기하게 한다. 쓸쓸한 인생에는 ‘눈부신 선택’이라는 순간의 아름다움으로 채워져 있다. 『눈부신 안부』는 인생에서 마주하는 짧은 순간의 풍경은 단지 멈춤이 아니라, 삶에 마주하는 중요한 선택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창은 (吳昶銀 Oh Chang-Eun)
문학평론가.
200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부문 당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