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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에서 ‘문화다양성’으로 변화하는 한국 사회
정지은 (성북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장)
국룰1), 국민 여동생, 국민 사위… ‘국민’이라는 수식어를 단어에 이렇게 자주 붙여 쓰는 나라가 흔할까? 사실 ‘국민’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 또는 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고 나온다. ‘국민’이라는 단어로는 현재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구성원들을 모두 포함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국민’이라는 수식어가 일반적으로 자주 붙는다는 것은, 한국이 문화다양성 측면에서 얼마나 불리한 환경에 놓여있는지를 확인하게 해준다. 사실 한국은 ELF(Ethno-Linguistic Fractionalization) 지표로 봤을 때 민족 다양성에서 거의 완벽하게 동질적인 0에 가까운 수치를 보이는 국가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 사회가 얼마나 창조적이거나 혁신적일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CTL(Cultural Tightness-Looseness) 지표에서도 문화적 경직성이 매우 높은 나라에 속한다. 구성원들이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문화다양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조건을 두루 갖춘 셈이다.
1) ‘국민’과 ‘룰(규칙)’을 합친 신조어로, ‘국민 룰’의 줄임말이다. 정식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통용되거나 유행하는 규칙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언어 측면에서 살펴보자. 사회는 ‘언어’로 구성되며, “사회란 사람들이 말을 섞는 순간 만들어진다2)”. 사회는 변하기 마련이고, 새로운 관계와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사회 구성원들의 새로운 욕망에 따라 신조어가 탄생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국적 불명의 신조어들이 탄생하는 지금,말에도 유효기간이란 게 있다면 ‘문화다양성’이라는 말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
2) 백승주, 『미끄러지는 말들』, 타인의사유, 2022
집단과 사회의 문화가 표현되는 다양한 방식을 뜻한다는 사전적 정의와 다르게 ‘문화다양성’이라는 단어는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대신 호명되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다문화=문화다양성’은 아니다. 사실 ‘다문화’라는 단어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실제 한국 사회에 처음 ‘다문화’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도, ‘혼혈’이라는 단어의 대체제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다문화가 정책적인 필요에 의해 ‘다문화가족’으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국제결혼 가정을 가리키게 되었고, 한국에서 창조된 ‘다문화가정’ 개념은 다양성을 강조하는 대신 ‘다르다’에 초점이 맞춰진 채로 확산되었다. 처음에는 선의로 만들어진 용어였지만 다름과 차이에 방점이 찍혀 있었고, 국제결혼가정과 귀화자만 포괄하는 정부 정책과 맞물리면서 ‘다문화’라는 단어는 편견을 굳히는 말이 되어버렸다.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는 오염되어 더 이상 쓸 수 없는 말이자 ‘닳고 닳아서 원래 의미를 잃어버린 말’이 되어가는 중이다.
‘다문화’에서 ‘문화다양성’으로 언어가 바뀌는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가장 먼저 체감하는 변화는 설문조사 문항이다. 설문조사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답하게 되는 질문이 바로 ‘성별’을 묻는 질문이다. 최근 가장 두드러지게 확인할 수 있는 변화는 성별 체크란이 2개가 아닌 설문조사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 여성의 순서를 뒤집어 여성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있고, 기타 혹은 미응답이라는 응답이 함께 등장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성별로 설문조사의 결과가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할 수 있게 된 셈이고, 젠더가 이분법적이지 않음을 인식하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별을 묻는 설문조사> ©온라인 캡처
한국에서만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넷플릭스는 아예 직원들의 다양성에 대한 최신 통계를 매년 보고서3)를 통해 공개하고 있으며, 별도의 포용 전략팀을 두고 인종, 나라, 성별 등이 다르게 구성된 다양한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자신과 비슷한 이들을 고용하는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넷플릭스뿐만 아니라 애플,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기업들은 다양성 보고서를 내고 ‘다양성 총괄 책임자’ 직책을 신설하는 등 다양성을 기업 경쟁력의 핵심으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3) 보고서 바로가기
<넷플릭스 포용전략팀> ©넷플릭스 홈페이지
사실 문화다양성을 확보하는 가장 중요하고 간단한 방법 중 하나는 의사 결정 집단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고위직 집단의 인구통계적 다양성은 모든 시민의 이해관계를 더 잘 통합하는 정책 결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의사 결정 집단의 다양성 확보가 어렵다면 구성원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Ms. Magazine 2021 겨울 커버사진> ©인터넷 캡처
작년에 만 12세 이하 어린이와 동반보호자 2인까지 궁능 무료 입장을 실시하면서, 외국인 어린이 일부와 동반보호자가 무료 입장에서 제외돼,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후 어린이날에 국적과 연령에 따른 구별 없이 궁능이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되는 중이다. 문화재청은 “내국인과 외국인에 대해 별도의 관람료 체계를 적용하고 있지만,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해 나가는 사회적 추세를 반영하기 위해 관람료 규정체계 자체를 정비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내국인과 외국인에게 동등한 규정을 두지 않던 관행을 고집하는 대신 문화다양성의 관점을 반영한 결과, 전체 구성원들에게 더 커진 혜택이 돌아가고 관련 규정을 바꾸는 변화가 시작된 셈이다.
<바뀌기 전 문화재청 안내문> ©문화재청
마지막으로 애플 다양성 리포트의 한 문장을 소개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같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최대 강점입니다”
정지은 (鄭知恩, JUNG JIEUN)
문학과 문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글들을 쓰고 있으며 행정과 기획, 지원과 실행 사이를 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