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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가 기억하는 감각의 시간을 입다

최바람 개인전 <날개, 싸돌아다니다>

김현주 (모모하시니의 만물작업)

타자의 감각에 편승하는 순간, 내 기억과는 무관한 새로운 경험이 시작되기도 한다. 지난 2020년 가을부터 송도 간척지의 갈대숲에서 사데풀(국화과 꽃) 씨앗을 채취하여 여섯 차례 전시를 연 최바람 작가의 마지막 전시가 미추홀구 ‘공간 듬’에서 열렸다. 사데풀은 민들레와 흡사한 염생 식물로 서해안의 바닷가 주변에서 주로 발견되는 흔한 풀이지만,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나 역시 사데풀의 이름을 전시를 접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무명이었던 사데풀은 전시를 통하더니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으며 기억의 매개물이 되었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사데풀을 ‘만난’ 것이다.

공간 듬 내부 전시 전경
공간 듬 내부 전시 전경

공간 듬 내부 전시 전경, 2023
(사진 제공: 김현주)

최바람 작가의 사데풀은 인천대공원을 시작으로 장미근린공원, 캠프마켓과 소래습지생태공원 그리고 인천대 송도캠퍼스와 인천대 평생교육 트라이버시티를 거쳐 ‘공간 듬’에서 이동을 멈췄다. 날개라 불리는 사데풀은 그동안 싸돌아다닌 여섯 군데의 장소와 공간의 기억을 가득 품고 멈춤을 통해 ‘공간 듬’에서 또 다른 감각의 시간을 풀어냈다. 소래습지생태공원의 물길과 소금기가 만든 선의 형상들, 캠프마켓 전시에서의 잔디의 색 변화와 구에 투영되는 물기의 모습 등 자연이 만드는 날 것의 변화를 날개인 사데풀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더불어 실내 공간이었던 인천대학교 예술체육대학과 평생교육 트라이버시티에서의 전시는 사데풀이 가득 담긴 구를 수직 혹은 수평으로 높게 매달아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투명 천정을 통한 날씨의 변화로 인한 모습과 더불어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시선과 걸음 등으로 인해 좀 더 다른 층위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작가는 지역의 곳곳을 싸돌아다니며 공적 혹은 사적인 장소에서 수집한 기억과 다양한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구 안에 담길 것을 기대했다고 한다.

2020 송도 채취
2021 송도 설치

2020 송도 채취와 2021 송도 설치.
(사진 제공: 최바람 작가)

2022 소래습지생태공원
2022 인천대학교 평생교육 트라이버시티 설치.

2022 소래습지생태공원, 2022 인천대학교 평생교육 트라이버시티 설치.
(사진 제공: 최바람 작가)

사데풀의 기억을 기록하여 공유하는 작업인 <날개, 싸돌아다니다> 전시는 일곱 번째 전시를 마지막으로 ‘공간 듬’에 정착했다. 7평 남짓한 네모반듯한 전시장인 ‘공간 듬’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투명한 구가 주렁주렁 매달린 묘한 풍경에 감각의 날이 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추홀구 신기시장 주택가, 동네 깊숙이 들어앉은 ‘공간 듬’ 바로 앞은 작은 공원인데, 노인은 물론 어린이들까지 자유롭게 이용하는 일상적 장소이다. 코앞 공간의 전시 덕분에 무뎌진 일상에 감각의 날개를 달 수 있으니 지역 주민의 입장에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간 듬 작은 창과 풍선에 투영되는 입구
공간 듬 작은 창과 풍선에 투영되는 입구

공간 듬 작은 창과 풍선에 투영되는 입구, 2023
(사진 제공: 김현주)

천천히 움직이는 풍선들
천천히 움직이는 풍선들

천천히 움직이는 풍선들
(사진 제공: 김현주)

투명한 tpu 풍선 안에 사데풀 씨앗을 담아 낚싯줄로 매달아서 연출한 공간의 풍경을 작은 창을 통해 외부에서 들여다본다. 투명한 구로 가득 찬 공간은 고요하고 적막하지만 불편하지 않다. 그럼에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 안의 이야기들은 소란스럽다. 사데풀 씨앗은 여태껏 어떤 이야기를 담으며 인천의 곳곳을 싸돌아다녔을까, 잠시 상상해 본다. 몇 가지의 생각이 스치는 순간에도 돌아오는 답은 낮게 흐르는 바람 소리뿐이다. 적극적인 이동을 하며 정착을 한 것에 비해 매우 정적인 공간에서 일상의 번잡스러움을 벗고 잠시 평화를 맛보았다.

생물이 갖는 날개는 적극적인 이동 수단이다. 이동은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옮기며 시작되는 것인데, 떠남은 반드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지나가고 머물기를 반복하며 만난 이야기들을 사색한다고 했다. 눈높이의 작은 창을 통해 미세하게 흘러드는 바람결을 따라 춤을 추듯이 흔들리는 구의 찰나에서 날개의 시작을 본다. 이미 지나버린 날개의 시작을 직접 경험한 것처럼 생생하고 짧게 감각한다. 작가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나만의 이야기를 새로 쌓게 되는 순간이다. 공간의 그림자를 통해, 창문을 통해 스미는 빛을 통해서, 내 모습을 흡수하듯 반사하는 구는 정체된 채로 흔들리고 있었다. 원형을 기억하는 감각의 경험을 얻음과 동시에 나는 그대로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나의 이야기는 바닥에 깔려있는 장소 즉 고향에 대한 기억과 관계들이다. 날개, 사데풀을 만나며 감각으로 퍼 올린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공유해보면 어떨까. 새롭게 삶을 감각할 수 있는 순간을 선물한 날개에게 감사를 표한다.

공간 듬, 2023
공간 듬, 2023

공간 듬, 2023
(사진 제공: 최바람 작가)

김현주

김현주 (金炫住 / Kim Hyun Ju)
모모하시니의 만물작업 대표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도 하는 참치형 동네 작업자. 동네 작업실에서 사람들과 재미있는 일을 작당 모의하기도 하지만, 주로 육아를 한다. 요즘은 지역에서 문화예술 활동을 하는 부모의 육아와 삶, 작업적 연대에 관심이 많아 최근 모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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