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커튼콜? 아니 새로운 1막!

인천시립극단 이범우 배우의 유쾌한 정년

류수연 (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이범우

이범우 / Lee Beom woo / 李範雨
작품활동
연극 – 심청왕후, 파우스트, 열하일기 만보, 거대한 뿌리, 다스 오케스터 등 120여 편 출연
단편 영화 – ‘틱’ 작/연출, ‘셀레나’ 등 출연
드라마 – 불멸의 이순신, 야인시대, 거상 김만덕, 환향녀 등 다수 출연
연출 – 시민 연극, 경력 단절 여성 배우 양성 교육 (여성 가족 재단), 단편 영화, 송도 3동 주민 자치 축제, 무의도 단편 영화제, 시니어 모델 패션쇼

약력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충남 당진에서 인천으로 전학을 와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예술 전문대학 연극과를 졸업했다. 이후 극단 ‘부활’에 입단하여 낮에는 어린이극, 저녁에 성인극을 공연하며 배우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거침없이 달렸다.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연극 작업을 하면서 모노드라마 ‘북치고 장구치고’ 제작/연출/출연을 했고, 인천을 비롯한 여러 지방에서 3년 동안 공연을 했다. 이후 1995년 3월 인천 시립에 입단하여 연극 공연과 인천 시민 연극, 학생 연극, 축제 연출, 단편 영화제, 경력 단절 여성을 위한 배우 양성 교육, 단편 영화 감독, 시니어 모델 패션쇼 연출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어 작업을 해오다 22년 6월 30일에 정년 퇴직을 했다. 앞으로도 새로운 작업들을 설레는 마음으로 해 나갈 생각이다. 지금은 소비자 연맹과 연극 작업 진행 중이다.

지난 6월 22일은 인천시립극단에 있어서 특별한 날이었다. 1995년 공채로 입단한 이후 90여개 작품으로 인천시민과 만났던 이범우 배우가 정년퇴직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삶이 나이에 매인 것은 아니지만, 공립 예술단에 소속되었기에 맛볼 수 있는 정년은 모든 이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갈 것 같다. 그는 다른 기사에서 ‘27년 동안 걸판지게 잘 놀았다’라는 말로 정년퇴직을 맞이한 자신의 소회를 유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이 인터뷰는 이범우 배우의 커튼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제 전환점을 맞이한 그의 새로운 1막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지난 40년 연기 인생을 정리하는 한편, 이제 막 펼쳐진 그의 새로운 무대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를 채우고자 한다.

인천시립극단 정년 퇴임을 기념하는 환송식에서 (2022. 6월)
인천시립극단 정년 퇴임을 기념하는 환송식에서 (2022. 6월)
인천시립극단 정년 퇴임을 기념하는 환송식에서 (2022. 6월)

인천시립극단 정년 퇴임을 기념하는 환송식에서 (2022. 6월)
(사진 제공: 이범우)

S #1. 교실의 재간둥이

이범우 배우의 인생 첫 장면은 라디오에서 김정구 선생의 ‘두만강’을 따라 부르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그에겐 마당이 곧 무대였다. 본래 내성적인 편이었음에도 무대가 체질이었는지, 몇 사람만 모여도 그 앞에서 공연을 펼치고는 했다.

그저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을 좋아했던 아이가 본격적으로 끼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였다고 한다. 짜깁기하듯이 대본을 짜서 쉬는 시간에 발표하는 것은 일상이었고, 수업시간이 지루해지는 순간이 오면 어김없이 불려나가 원맨쇼를 펼치기도 했다. 응원단장 정도의 감투는 기본으로 장착했고 말이다.

배우라는 꿈이 좀 더 구체화된 것은 중학교 2학기, 당진을 떠나 인천남중으로 유학을 오면서부터였다. 당시 큰 누님이 결혼해서 인천에 살고 있었는데, 누님댁에서 더부살이 겸 유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배우에 대한 그의 꿈도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대학 진학을 앞두고 진짜 갈등과 설득의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말이다.

S #2. “제 인생은 제 꺼니까 제가 책임질게요.”

대학 입학을 앞두고 누님뿐만 아니라 아버지와도 갈등이 심해졌지만, 그 누구도 배우가 되겠다는 그의 간절함을 꺾을 수는 없었다. 간절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자기 인생을 건 선택에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는 그의 말은, 완고했던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었다. 재수 끝에 서울예전(현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하면서 이범우의 ‘배우 인생’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연기에 대한 그의 열정을 감당하기엔 무엇보다, 2년이라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그는 학교 들어가자마자 미친 듯이 연극에 자신의 전부를 바쳤다고 한다. 연기에는 끝이라는 것이 없었고, 그래서 더 매혹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첫차를 타고 새벽에 등교해서 막차를 타고 하교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연습실에 몰래 남아서 밤새도록 연습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매력을 느꼈던 것은 인간 심리를 파고드는 연기와 인물 분석이었다. 정극과 뮤지컬이라는 갈림길에서 그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정극을 선택했다.

졸업 후 극단 활동을 시작하면서 연극에 대한 그의 열정은 더욱 불타올랐고, 또 그만큼 깊이 좌절하기도 했다. 그는 명동 엘칸토 예술극장 극단 부활에서 사회 초년생이자 예술가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연히 많은 부침이 있었다. 석유 난로와 침낭 하나 달랑 있는 연습실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했고, 하루 한 끼 외상으로 먹는 닭곰탕으로 배고픔을 견뎌내야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공장에서 상품을 찍어내듯이 연기해야 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공연이 끝나도 밥집 외상값 갚고 나면 다시 빈털터리가 되는 현실은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생존의 문제는 예술로서만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S #3. 잠시 멈춤, 그리고 모노드라마 <북 치고 장구 치고>

이범우 배우는 연극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잠시 멈출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꿈을 지속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스스로 벌어서 작품을 제작하고 싶다는 꿈을 실현해 보고 싶었다. 다시 인천으로 내려와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옷가게를 열기도 했다. 3년 동안 가게를 운영하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한 것은 가장 큰 행운이었다.

그러나 연기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옷가게 운영이 어려워진 걸 계기로 그는 다시 연극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대단히 아이러니한 상황이기도 했다. 생존이라는 현실에 부딪혀 ‘잠시 멈춤’을 선언했던 그가, 오히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다시 복귀하기를 선택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이 ‘멈춤’의 시간은 그를 좀 더 강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제작에서 연출, 출연, 기획까지 1인 4역을 감당해낸 <북 치고 장구 치고>를 통해 연기에 대한 열정을 다시 지필 수 있었다고 한다. 돌체 소극장에서 1개월의 공연으로 시작한 <북 치고 장구 치고>를 직접 비디오 찍어서 사방으로 홍보하면서 3년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동력은, 그 ‘멈춤’에서 야기된 동력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1995년, 서른이 훌쩍 넘긴 나이에 그는 인천시립극단의 공채에 지원해서 합격을 하게 된다. 최고령 합격이었다. <북 치고 장구 치고>의 옷차림 그대로 나와서 연기하는 이범우 배우를 높게 평가한 사람은 당시 심사위원장으로 왔던 고 이근삼 희곡작가였다고 한다. 나이와 상관없이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준 심사위원들 덕분에, 이범우 배우는 인천시립극단에서의 ‘걸판진 무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인천시립극단 공연 사진
인천시립극단 공연 사진
인천시립극단 공연 사진
인천시립극단 공연 사진

인천시립극단 공연 사진
(사진 제공: 이범우)

KBS 드라마 스페셜 ‘환향녀’

KBS 드라마 스페셜 ‘환향녀’
(출처: KBS 홈페이지)

조선 양반 상경기, 현장 촬영 모습

조선 양반 상경기, 현장 촬영 모습
(사진 제공: 이범우)

S #4. 인천시립극단, 무대를 만끽했던 27년

이범우 배우가 인천시립극단에서 무대에 올랐던 작품은 약 90여 편이라고 한다. 한 배우의 인생이 그대로 인천시립극단의 무대 위에 녹여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중에서도 그의 기억에 가장 깊게 새겨진 작품들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첫 번째로 꼽는 작품은 바로 인천시립극단의 대표작이기도 한 뮤지컬 <심청왕후>다. 초연에서는 뮤지컬 <명성황후>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소프라노 김원정이 주인공 심청으로 출연했고, 이범우 배우는 심봉사 역할을 맡았다. 이 작품은 연일 매진되었고, 앵콜 공연까지 이어지면서 한 마디로 대박이 난 작품이었다.

뮤지컬 심청왕후 공연 모습

뮤지컬 심청왕후 공연 모습
(출처: 인천문화예술회관 홈페이지)

이와 함께 그가 두 번째로 꼽은 작품은 <파우스트>다. 그는 이 작품에서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역할을 맡았는데, 독특한 인물 분석으로 호평을 받았다. 기존의 연극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진지하고 절대적이며 강력한 악이었다. 그런데 이범우 배우는 이 악의 이면을 좀 더 재미있게 분석하고자 했다. 보다 인간적이고 한편으로는 코믹하기까지 한 메피스토펠레스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 것이다.

인천시립극단 작품 ‘파우스트’에서 악령 메피스토펠레스 역으로 출연한 모습

인천시립극단 작품 ‘파우스트’에서 악령 메피스토펠레스 역으로 출연한 모습
(@인천투데이 심혜진 기자)

배우라는 직업의 가장 큰 장점은 무대 위에서 수많은 인생을 대신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동시에 배우는 언제나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숙명에 놓인 존재이기도 하다. 역할에 대한 최종적인 권한은 연출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역할을 할 때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에 배우는 주어진 역할 속에서 그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인물을 연기해내야 한다.

그런데 이범우 배우는 바로 이 점 또한 배우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지점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무대에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무대와 우리의 인생이 닮은 이유가 아니겠는가?

새로운 막 : “걸판지게 놀았으니 이제 가지 않았던 길, 새로운 길을 가야죠.”

사실 예술가에게 정년퇴직이라는 말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죽는 날까지 자기 예술의 완성을 밀고 나가는 것이 예술가의 숙명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인천시립극단이라는 공립 예술단에 소속되지 않았다면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마무리를, 이범우 배우는 충분히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27년간 인천시립극단이라는 무대 위에서 정말 걸판지게 놀았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정년퇴직은 이제 그에게 지금까지 가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시작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정년 이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시민연극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사실 연극을 하면서 외부에서 강연을 하거나 시민극단을 가르치는 일을 자주 했는데 그 일에서 높은 만족을 느꼈다고 한다. 정년퇴직 전에 인천소비자연맹의 시민연극을 지도하기로 결정했고, 인터뷰하는 현재까지 그 일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인천여성가족재단 여성연극단 수강생들과 첫 시연을 마친 후 포즈를 취한 사진

인천여성가족재단 여성연극단 수강생들과 첫 시연을 마친 후 포즈를 취한 사진
(@인천투데이 심혜진 기자)

평생학습센터 공연 장면 (사진 제공: 이범우)
평생학습센터 공연 장면 (사진 제공: 이범우)

평생학습센터 공연 장면
(사진 제공: 이범우)

연기 인생의 새로운 막이 열린 지금, 그가 꿈꾸는 새로운 극은 무엇일지 물었다. 그는 먼저 찾아가는 공연의 필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인천시립극단에 있으면서 때때로 외부 수업을 하고는 했는데, 그때 느낀 것이 생활 속에서 더 연극을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를 중심으로 한 청소년극이 더 확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도덕이나 윤리교육과 연극이 접목될 때 확실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스스로 쓰고, 분석하고, 연기하고, 극을 꾸리는 과정을 통해 청소년 스스로 사회적인 자아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자신을 위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이미 6년 전에 <틱>이라는 17분짜리 단편 영화를 제작하고 연출한 경험이 있는 그는, 앞으로도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단편 영화를 연출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본연의 천직인 배우에 충실하지만, 그것을 벗어난 새로운 도전에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사회적 정년이 오히려 예술가로서의 혼에 새로운 기름을 부은 것일까? 그는 퇴직 후에 자신의 활동이 더 방대해질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어떤 것이든 자유롭게 시작할 수 있는, 그리하여 더 많은 가능성이 자기 앞에 있음을 느끼는 그는, 여전히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연기 인생을 통해 쌓았던 노하우를 다양한 분야에서 녹여내는 일. 그것이 배우 이범우의 새로운 시작점이 될 것을 기대할 수 있었다.

류수연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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