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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장 이음 1977: 사라지는 건물들과 혼재된 시간 사이에서

우리가 이어야 하는 것

“37년간 골목 지켜온 ‘을지면옥’. 마지막 영업”

“2015 서울미래유산’ 지정된 을지OB베어, 끝내 문 닫아”

정수경 (건축사연구자 겸 전시기획자)

‘경제적’이라는 마법 단어가 붙는 순간, 다수의 근현대 유산은 손쉽게 스러진다. 예를 들어, 경제적 이유, 경제적 가치, 경제적 어려움, 경제적 이익, 경제적 자유, 경제적 지원 그리고 경제적 파국 등, ‘경제’가 포함되는 순간 해당 이유는 절대적인 문법으로 변모하며 근대 문화를 함유한 건축물에게 철거 선고를 내린다. 인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 번째 개항 도시지만, 항구와 수도를 잇는 대량수송 수단인 경인 철도가 놓이며 인천에는 다수의 근대 건축물이 꽃피울 수 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문화적 토양도 절대적 문법인 경제적 요인 앞에서는 존재의 이유가 쉽게 사라진다.1
1. 이순민, “인천시 ‘개항기 근대건축물 밀집지역 지구단위계획’에 보전 대상 건축물로 분류됐던 53동 가운데 11동은 철거된 상태다.” – 인천일보

그런 와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인천도시공사가 지역 문화 생태계 조성을 위해 건축자산을 매입하여 활용하게 된다는 것. 그 대상으로 송학동 1가 2-4에 위치한 주택이 선택되었다는 것. 자유 공원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언덕 위에 위치한 이 집은 한국건축의 주춧돌 중 하나인 김수근 건축가의 작품이다. 영진공사 전 회장 부부의 의뢰로 1977년,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전경을 도화지 삼고, 가파른 언덕을 지지대 삼아 재치 있는 집이 지어졌다. 2019년, 이 건물은 근대건축문화자산 재생사업 1호로 선정되어, 2년 반 동안 연구와 최소한의 리모델링을 마치고 올해 6월 14일 ‘개항장 이음 1977’(이하 이음)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에게 문을 열었다. 본 글은 이음을 답사하며 발견할 수 있는 각각 다른 시간적 지층이 하나의 건축물을 형상화하는 구조를 따른다.

인천도시공사가 진행한 근대건축문화자산 재생사업 1호 – 개항장 이음 1977 전경사진

인천도시공사가 진행한 근대건축문화자산
재생사업 1호 – 개항장 이음 1977 전경사진
(출처: 인천도시공사 홈페이지)

인천도시공사가 진행한 근대건축문화자산 재생사업 1호 – 개항장 이음 1977 내부사진

인천도시공사가 진행한 근대건축문화자산
재생사업 1호 – 개항장 이음 1977 내부사진
(출처: 인천도시공사 홈페이지)

B1. 땅에 새겨진 지층, 국제도시

북한과의 대치로 인해 바다를 최대한 활용하지는 못하지만, 인천은 중국과의 무역이 가장 빠른 도시다. 국제공항도 인천에 있다. 바닷길과 하늘길을 아우르며 형성하고자 하는 ‘국제도시’ 인천의 브랜딩은 사실 130년 전에 시작되었다. 2영국, 미국, 독일, 청, 일본에서 파견한 유력인사들은 새로운 땅에 ‘자신들의 건축’을 지었으므로, 이름 없던 언덕 동네(현 송학동 인근)에 형성된 각국 조계지는 다양한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일종의 건축 카탈로그가 되었다. 높게 솟아 있는 뾰족한 지붕과 아치들이 이어진 열주 등 서양식 건축물은 당시 상류층에게 ‘권력이 집적된 집’을 짓기 위해 참고해야 했던 실질적인 교과서였다. 당시 조선의 평범한 도보 산책자들에게도 해당 건축물들은 가보지 않은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수단이었음에 분명하다. 현 이음 건축을 해석하기에 앞서 그 건축이 딛고 서있는 땅에 한 세기 전의 국제도시라는 지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천의 근대 건축물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2. 서은미, <지역과 공간의 기억, 송학동 1가 2-4 건축아카이브>, 『인천문화현장』, vol.44, 2020, p.182-190

1F. 축이 비틀린 건물

제물포구락부, 근대건축전시관, 인천개항박물관, 대불호텔(2017년 재현), 인천아트플랫폼 등 근대 건축물을 다시 금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다수의 프로젝트들에서 건축 체험형 이음의 역할은 무엇이며 어떠한 비전을 제시해야 할까. 타 근대건축자산에 비해 조선 말기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에 구축된 타 건물에 비해 비교적 최근에 지어 졌다는 점이 두드러지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음이 완공된 1977년은 조금씩 비켜난 시간의 축이 여러 개 쌓여 있다.

축 A. 1971년, 김수근 도면
책과 잡지, 사진으로 해외 건축문화를 접하던 전후 한국 건축계에서 일본에서 유학한 건축가 김수근은 동시대 건축 가들에게 세계적인 판위에서 현대 건축을 논할 수 있는 일종의 통로를 제공했을 것이다. 그가 제안한 주택(현 이음) 역시 서구화된 생활 양식이 스며든 구조이다. 처음 클라이언트 부부에게 의뢰를 받아 제작한 도면을 살펴보면 현재 의 건물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가파른 경사를 따라 현관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현관의 위치가 다르다. 김수근의 입면도에는 상부층과 지하층의 구분이 확실하다. 부엌과 테라스의 위치도 현재와는 정반대에 있다 (이 지점에서 1971년과 1977년 건축 설계의 변화에 대해 더 논의될 필요가 있다). 김수근의 도면을 통해 읽어낼 수 있는 재미는 해가 가장 잘 들어오는 남쪽(본 주택은 서남향이다)에 옥외 식당과 테라스를, 면적에 비해 넓은 잔디 마당과 수영장 을 구상했다는 것이다. “건축은 시대를 반영”한다는 김수근의 건축 철학처럼 기업 오너였던 클라이언트의 니즈와 삶의 형태를 건축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축 B. 1977년 김원석 도면
현재의 이음 건물의 형태는 김원석 건축가의 설계 도면에서 왔다. 김원석은 1969년부터 김수근이 타계할 때까지 함께 건축사무소 ‘공간’을 이끌었다. 같은 기간 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 1979년 준공)과 경동교회(1981년 준공) 를 진두지휘하던 김수근이 이음 주택의 설계 총괄을 김원석에게 맡겼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마치 바람개비처럼 중앙 계단을 기준으로 공간들이 층위가 리듬감 있게 퍼져나가는 스플릿 플로어3 구조, 바다를 조명하는 통창4 그리고 중심 측에서 살짝 틀어진(asymmetrical) 현관과 응접실은 김원석 도면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물론 최종 회의에는 김수근 건축가의 컨펌이 있었을 테지만, 건축사적 가치가 있는 본 주택의 설계자 표기에는 ‘김수근, 김원석의 협업’으로 표기하는 게 옳다. 건축사(history)는 계보의 학문이다. 김수근이라는 통로를 통해 해외 현대건축의 경향이 한국으로 전해오듯, 김원석이 몸담았던 ‘공간’에서 공통의 합의로 확립한 건축문화(예를 들면, 벽돌 사용)가 동료 및 후배 건축가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창작자 혹은 참여자를 밝히는 것은 입체적인 한국 현대건축의 계보를 마련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3. 스플릿 플로어(Split Floor): 층과 층 사이에 엇나가게 층을 하나 더 만드는 건축 구조. 공간을 더 넓고 개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4. 1978년 완공된 김원석 건축가의 <아리장>의 통창, 모서리창, 직각 처마 구조는 이음의 형상과 매우 흡사하다.
링크참조

이음을 답사하며 가장 흥미로웠던 스폿은 중앙 계단과 응접실이다. 본 건축물은 서남향이다. 거실의 통유리창은 바다 풍광을 액자처럼 떠 담아냈지만,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 공간은 축을 ‘남향’으로 비틀었다. 또, 답답할 수 있는 ‘역 ㄱ자’의 방 모서리에 창을 터냈다. 사용자에게 자연을 조망하는 틀을 다각도로 제공한다. 또한, 그 축이 남향으로 빗겨난 응접실은 중앙의 스플릿 플로어 계단을 통해 리듬감 있게 배열된다. 클라이언트 부부가 거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중앙 계단을 중심으로 가장 낮은 주방-식당-거실 레벨 → 현관 → 응접실 → 안방 순으로 다양한 높낮이의 공간 배열을 갖춘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걷는 듯한 리듬감과 변화가 이음의 핵심에 있다.

김수근 평면도 대체

김수근 평면도 대체

김수근 도면 대체

김수근 도면 대체

(사진 제공: 정수경)

축 C. 19세기 말 유럽 주택에서 채집한 레퍼런스
‘주택’은 한국에서는 낯선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에서 단독주택이 설계된 역사를 살펴보면 1876년 개항 이후 부산, 원산, 인천 등의 개항장 중심으로 외국인 거류지가 형성되어 양식 및 일식으로 건축되면서부터다.5 DNA 자체가 바다 밖 나라들에서 왔다. 김수근, 김원석, 두 건축가는 주택을 짓기 위해 당연히 해외 주택 레퍼런스를 살펴봤을 것이다.
5.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이음의 주택은 19세기 말, 프랑스 및 영국 건축과 유사하다. 첫째, 비대칭적인 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활동했던 프랑스의 건축가 루이 보니에는 산업의 발전으로 생겨나는 신흥 부르주아 클라이언트의 요청으로 지중해와 대서양 바닷가에 여러 채의 주택을 지었다. 그의 건축의 특징은 일조량과 아름다운 풍광을 집 안에서 최대한 즐길 수 있도록 정형화된 축을 비틀어 최적화된 방향을 지닌 건축을 설계했다.

둘째, 현지의 재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 시기 유럽 건축가들은 지역성이 도드라진 재료를 사용했다. 주변 지형이나 생산 공장에 따라 석회암, 사암을 사용하거나 벽돌을 사용했다. 근처에서 재료를 공수한다는 경제적인 요인도 있지만, 지역만의 역사, 지역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김수근은 한국 전통 검은 벽돌을 사용하는 것으로 자신의 건축에 한국성을 삽입하고자 했다. 이음 건축 외장재의 검은 벽돌도 공간 건축의 한국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셋째, 설계에 맞게 건축 내부 가구 등의 디자인을 건축가가 직접 설계했다는 점에서. 규격화되지 않은 비대칭적인 형태를 사용함으로써 생길 수밖에 없는 자투리 공간을 활용하는 가구 디자인은 19세기 말 프랑스 및 영국의 건축가들이 많이 사용했던 방식이다. 대표적으로 파리 지하철 입구의 파빌리온을 디자인한 것으로 유명한 헥토르 귀마(Hector Guimard)는 문고리 손잡이까지 디자인하며 건축이야말로 총체 예술(Art total)이라 주장했다. 이음이 딱 그렇다. 스플릿 플로어를 도입함으로써 생기는 여유 공간은 창고로 제작했다. 옷장, 책장 등의 가구도 건축가의 디자인이다. 또한 가장 공들였던 계단의 높은 층고에는 김수근이 직접 일본에서 공수했다는 펜던트 조명이 달려있다. 다소 거칠게 비교했지만, 근현대 주택 건축물에서 건축사적인 가치를 찾아내는 연구, 역으로 19세기 건축물에서 현대 건축에 계보로 내려온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는 현재 프랑스 학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6 한국 현대 건축 역시,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하지 않았듯, 근현대 건축자산에 남아있는 역사성과 모더니티에 관해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6. 예를 들면, 김수근은 아치 구조는 자주 사용했는데, 이를 두고 시카고학파건축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시카고학파의 시초 루이스 헨리 설리번은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 건축과에서 유학한 후, 시카고로 귀국해 건축가 생활을 시작한다. 프랑스 보자르 건축의 영향이 시카고에 이식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과 프랑스 건축사학계는 현대 건축의 모더니티의 출처를 찾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중이다.

루이 보니에(Louis Bonnier), 앙블르퉈즈에 있는 네 개의 별장 (Quatres villas de baigneurs à Ambleteuse), France, 1894,Dossier 035 Ifa ©Sookyeong Jung
루이 보니에(Louis Bonnier), 앙블르퉈즈에 있는 네 개의 별장 (Quatres villas de baigneurs à Ambleteuse), France, 1894,Dossier 035 Ifa ©Sookyeong Jung
루이 보니에(Louis Bonnier), 앙블르퉈즈에 있는 네 개의 별장 (Quatres villas de baigneurs à Ambleteuse), France, 1894,Dossier 035 Ifa ©Sookyeong Jung

루이 보니에(Louis Bonnier), 앙블르퉈즈에 있는 네 개의 별장
(Quatres villas de baigneurs à Ambleteuse), France, 1894,Dossier 035 Ifa ©Sookyeong Jung

2F. 과거와 현재를 이어 형성하는 다양성

건축주 고 이기상씨와 공경화씨 부부는 주택이 완공된 1977년부터 2018년까지 40년이 넘는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클라이언트가 공간을 아끼고 보살피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 모습은 재건축 주기가 빨라지는 요즘 더욱 귀하고 아름답다. 이 집을 꼭 지켜달라는 고 이기상 씨의 뜻을 따라, 본 건축물은 이음이라는 이름을 통해 대중에게 이색적인 공간 체험을 매개하며 현대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호텔이나 시청 등 상업과 공공 영역의 건축 프로그램에 비해 집주인의 지인 혹은 특정한 상황이 아닐 경우, 주택은 쉽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 현대 건축의 토대를 마련한 거장 건축가의 주택에서 나타나는 공간론은 책과 사진 등의 시각자료로 볼 수밖에 없었다.

공들여 만든 공간이 대중에게 개방되었을 때 기대되는 지점은 사회적 스케일로 형성되는 공간에 대한 인식 제고이다. 프랑스 문화부에서는 1984년부터 일 년에 이틀, 오페라 하우스 내부 연습실, UNESCO 본부 등 평소에는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을 대중에게 무료로 개방하는 <유럽 문화재의 날>을 기획했다. 올해로 제39회를 맞이하는 이 행사는 유럽 대다수의 국가가 참여한다. 7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인내력과 튼튼한 두 다리만 있으면 엘리제궁의 내부뿐만 아니라 마크롱 대통령의 개인 집무실에는 어떤 TV가 놓여 있는지까지 알 수 있다(삼성을 쓴다). 또 다른 예로 영국에서는 1992년부터 일반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특별한 혹은 권위적인 장소나 건축물을 특정 기간 대중에게 공개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 역시 해외 50개 도시(서울 포함)에서 참여하고 있다.

역사적 가치는 물론이고 공사비, 참여 건축가의 노동력이 다른 ‘권력과 자본의 핵심 공간’을 무료로, 매년 방문하며 형성한 개인의 공간 인식 소프트웨어는 건축과 도시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과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우선 해당 자산을 왜 보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고한 사회적 합의점이 여기서 시작된다. 한 시간 반에 걸친 답사를 통해 이음의 내외부를 꼼꼼히 관찰하며, 해당 건축자산 재생 프로젝트의 의의는 위의 레퍼런스들과 유사하다고 여겼다. 약 오십 년 전의 낯선 공간을 탐방하며 새로운 자극점을 찾고, 공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 말이다. 28평형, 32평형, 48평형 네모 반듯한 아파트를 넘어 비대칭적이고 비정형적인 건축물을 탐닉하며 품어낼 ‘다양성’. 그 다층의 공간 감각은 시간의 축을 비틀려 형성된 이음과 개항장의 근대 건축물, 도로, 풍경 그리고 송도 신도시의 비정형적인 동시대 건물을 방문하면서 채워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건축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연구하고 콘텐츠로 생산하는 사람에게 인천은 신기한 도시다. 시간의 축이 하나가 아닌 도시, 축도 다양한데 도시 여기저기 시간의 파편이 묻어 있는 도시. 건축사 책을 보듯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이 혼재하는 도시로 여긴다. 그 속에서 인천의 근대 건축물은 시간을 견디고 낡았다가 늙었다가 다시금 젊어지고 재생한다. 개인적으로 이음에서 벌어질 일들을 기대하고 응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다양한 축이 존재하는 주택이 만들어낼 새로운 담론이 시간을 견디며 만들어 온 문화에 있어 그 존폐가 경제적인 요인으로 재단되지 않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개항장 이음주택 1977 내부 사진 (사진 제공: 인천도시공사)

개항장 이음주택 1977 내부 사진 (사진 제공: 인천도시공사)

정수경

정수경

건축사연구자 겸 전시기획자
파리1대학 근현대 미술사, 건축사학 박사과정
(PhD Candidate in History of Architecture in Université Panthéon-Sorbonne Pari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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