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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
한봉일
다수의 사람이 스웨덴 영화라면 낯설게 느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한 시절을 풍미했던 잉그리드 버그만과 영화사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평가받는 잉마르 베리만은 포함해 독특한 색감과 블랙 코미디로 칸과 베니스 영화제에서 본상을 받은 로이 안데르손, 2017년과 2022년 칸에서 연거푸 황금종려상을 받은 루벤 의스틀룬드도 모두 스웨덴이 배출한 영화인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스웨덴 영화가 조금은 친근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지난 9월 12일 영화공간주안에서 제13회 스웨덴 영화제가 개막했다. 개막작으로 선정된 <아브델>을 포함해 총 9편의 작품을 선보였고 4일간 진행됐다. 스웨덴 영화 시장의 규모와 제작 환경을 생각한다면 한 해에 많은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함에도 기대감을 충족시켜 줄 만큼 훌륭한 작품이 가득했다.
제13회 스웨덴 영화제 개막식
©한봉일
제13회 스웨덴 영화제 개막식
©한봉일
이번 13회 스웨덴 영화제에서 유독 눈길이 갔던 작품은 <아브델>과 <비커밍 아스트리드>다.
<아브델> 스웨덴 난민 2, 3세대의 단면을 깊이 있게 관통하고 있는 영화다. 이민 1세대와는 다르게 태어날 때부터 스웨덴 사람이었던 아브델을 향해 인종차별적 시선과 폭력 앞에 수의사라는 개인의 꿈이 무너지고 갱단과 도시 배경은 개인의 문제를 비쳐 사회적 문제를 온전히 들춰낸다. 영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스웨덴 천혜의 자연을 보여주지도 않고 한 소년의 행복한 미래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범죄가 만연한 스톡홀름의 예르바펠테트의 모습을 비추고 아브델이라는 소년 앞에 놓인 폭력성을 장르적 요소까지 더해가며 긴장감을 유지한다. 소년을 폭력에 노출시키며 그걸 장르적으로까지 소모하고 있다는 점은 윤리적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스웨덴이라는 국가를 향해 가지고 있던 무의식적인 환상을 전복시키고 난민 문제에 인식하기 어려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까지 심각성을 공감시켰다는 점에서 감독의 연출적 의도도, 영화라는 매체의 성과도 분명하다.
앞서 공감하기 어려운 주제라고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브델>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과연 우리나라와 무관한 일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게 된다. 단일민족이라는 말은 더 이상 무색해졌고 주위에서 다문화가정을 보는 일은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을 향한 무의식적인 인종차별과 폭력 앞에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다시금 생각해 볼 문제다.
<아브델> GV
©한봉일
<비커밍 아스트리드> GV
©한봉일
<비커밍 아스트리드>는 말괄량이 삐삐로 유명한 린드그렌 아스트리드의 전기 영화다. 위인의 비범한 일화를 다루는 게 아니라 예술가가 되기 이전의 삶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기존 전기 영화들과는 다르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김소미 기자는 버지니아 울프의 저서 자기만의 방을 통해 린드그렌 아스트리드의 삶을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설명했다. 여성의 경제활동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에 기자로 일했던 것이 아스트리드 본인의 경제적 독립을 이뤄냈고 글쓰기가 가능한 자기만의 방을 만들 수 있다는 접근이었다. 한편으로는 아스트리드의 삶은 스스로 ‘미혼모 되기’를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적으로 미혼모는 커다란 흠결이었고 가정을 꾸려 살아가는 것이 훨씬 안정적인 선택일 수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실망한 사람과 함께하기를 과감하게 포기하는 용기와 주체성을 보여준다. 미혼모라는 단어는 그녀를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고립시켰을지 몰라도 그녀의 인생이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과거는 위대함이 평범함을 가리는 시기였다. 절대다수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국가나 집단의 성장을 중요시했고 두 번의 전쟁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특별함을 고귀한 가치로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다. 거대 서사(남성 중심의 서술방식) 속에 가려졌던 미시적 서사(여성 중심의 서술방식)로 이끌어가는 구조부터가 그렇다. 그녀를 예술가로 만든 것은 평범한 인간이 겪을만한 평범한 일상의 중첩이다. 예술가라는 직업을 특별함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일상의 예술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상의 예술을 노래하는 <패터슨>과 <퍼펙트 데이즈>의 국내 흥행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린드그렌 아스트리드가 쓴 말괄량이 삐삐에 대한 이야기이다. 삐삐는 그 시절 어떤 작품과도 다르게 ‘말괄량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설정을 가지고 있다. 과거 아동 문학 수업에서 선생님은 이런 말은 한 적이 있다. 아동문학을 읽다 보면 과거 자신들의 욕망은 잊은 채 동화 속 아이들은 착하기만 바란다. 어린아이들도 욕망할 줄 알고 사건과 사고에서 성장한다. 린드그렌 아스트리드는 그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말괄량이라는 존재가 나쁘지 않다는 걸 린드그렌 아스트리드가 영화 속에서 말괄량이가 되면서 증명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예술이 삶의 미메시스라면 한국 영화 나아가 한국 사회는 스웨덴 영화의 미메시스일지도 모르겠다. 예술과 경제의 상관관계를 보았을 때, 어떤 예술이 우월한가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경제 발전 과정에서 예술도 구조적 단계를 거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의 예술은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자처하고 반대로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예술은 역사 속에서 지워졌던 약자의 목소리에 조금씩 귀를 기울인다. 문화적 저변이 사회적 현상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예술로 재현하는 정반합의 과정을 겪으며 예술도 나아간다. 복지 국가의 표상처럼 여겨지는 스웨덴의 문화 예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이전 세대에 스웨덴 영화가 아이와 여성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 최근 한국 영화에서 여성과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늘어난 것이 이와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스웨덴 영화제를 찾은 관객이 늘어날수록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기대하게 된다. 그들이 스웨덴 영화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습득한 사고와 인식들이 앞으로 다가올 변화들에 유연하게 깊이 있게 대응하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13회 스웨덴영화제 현장
©한봉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