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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와 창조적 상상력
전시 <문자와 삽화-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를 만나다>
우사라
한가하고 나른한 평일 오후,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찾았다. 며칠째 뿌연 하늘로 대기질 나쁨과 코끝이 시린 상쾌한 겨울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미지근한 기온 때문인가 순간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건가.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로 전시장에 들어섰다. 희망과 설렘에 사로잡혀 마냥 행복한 새해 따위는 이제는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나이가 된 것인가 침전된 우울함이 쉬이 해소되지 않는다. 멜랑콜리한 이 기분, 부유하듯 걷던 중 한 작품 앞에 멈춰섰다. <멜랑콜리아 I> 작품 속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깊은 상념에 사로잡혀있는 여성의 눈동자를 하염없이 들여다보게 된다.
멜랑콜리(melancholy)란 단어는 사람의 기질을 인간의 몸속에 흐르는 네 가지 액체인 혈액과 점액, 노란 담즙, 그리고 검은 담즙을 뜻하는 멜랑콜리아(melancholia)에서 유래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히포크라테스의 사성론(四性論)에 의하면 멜랑콜리한 이 기분은 검은 담즙의 과잉에 기인한 것이다. 현대의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말도 안 되는 해석이지만 내 몸에 지금 과잉되어 넘쳐흐르고 있을지도 모를 검은 담즙에 대해 생각해보며 다시금 작품 속 여성과 눈 맞추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의 시선은 도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허공을 응시하는 건지 어딘지 명확하지 않은 시선을 따라 A4사이즈 남짓한 작품을 찬찬히 읽어보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뒤러, 그 천재예술가의 극적이며 매력적이게 난해한 수수께끼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다면체, 원구, 주사위, 천칭, 모래시계, 저울, 컴퍼스, 마방진이라 불리는 정사각형 모양의 숫자판, 막대 모양의 자, 옆을 지키는 천사 케루빔, 옆에 누운 몽롱한 눈빛의 개 등 디테일한 회화적 표현 방식을 넘어선 신비로운 도상들에 대해 해석하고 그 의미들을 하나씩 유추해나가는 ‘해독의 즐거움’에 빠져들게 된다. 원구와 다면체는 우주의 형상을, 가로와 세로, 대각선의 합이 모두 34가 되는 4차 마방진은 신의 창조에 적용된 원리들을 상징하고 있다. 마방진의 맨 아랫줄 가운데 보이는 15와 14는 이 판화의 제작년도인 1514년을 뜻하며 뒤러의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해인 어머니가 사망한 해를 나타내기도 한다.
멜랑콜리아 제목을 들고 있는 듯한 박쥐는 진리와 윤리, 앎과 삶을 통합하길 바라는 인간성에 대한 공격을 일삼는 동물을 상징하며, 옆에 놓인 사다리는 인간 영혼을 상승시키도록 돕는 지평을 넓히는 도구로 해석된다. 제일 중요한 상징은 상념에 사로잡힌 날개 달린 여인이 바로 멜랑콜리한 천재, 뒤러 본인의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이 여인 발 아래, 그리고 머리 위, 다양한 공간 속에 놓인 도구들이 뜻하는 것은 측량의 과학인 기하학을 통해 멜랑콜리한 기분과 상황을 벗어나 새로운 창조적 질서를 도모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명확하지 않아 혼란했던 나의 멜랑콜리를 뒤러가 짜놓은 그 창조적 질서 위에 두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전시장 입구로 발걸음을 옮겨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두 번째 기획전시 <문자와 삽화-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와 만나다>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알브레히트 뒤러, 멜랑콜리아 Ⅰ,
동판화, 1514년. 오토쉐퍼박물관 소장.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제공]
전시 입구 전경 [필자 제공]
2023년 인천 송도에 개관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두 번째 특별전시로 북유럽의 위대한 르네상스 예술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의 대단히 섬세하고 놀라운 판화 작품들을 선보이며 문자와 삽화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말과 문자, 문자와 그림의 근본적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도록 마련했다. 문자의 해석을 더욱 풍성히 해주는 보조 역할을 했던 삽화는 뒤러의 작품 이후 판화만으로 충분한 하나의 완성된 예술작품이 되었다. 뒤러가 남긴 세 편의 탁월한 명작 <기사, 죽음 악마>,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 <아담과 하와>와 바사리가 ‘전 세계를 경탄시킨’ 예술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은 <멜랑콜리아 Ⅰ>가 포함된 4대 동판화와 <성모 마리아의 생애>, <대수난>, <묵시록>의 3대 목판화를 비롯하여 43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출품작품들은 독일 슈바인푸르트의 오토쉐퍼박물관 소장작품들로 1996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개된 이후 28년 만에 국내에 선보임으로 의미가 특별하다.
전시 전경 [필자 제공]
전시는 ‘1부 문자를 위한 그림’, ‘2부 그림을 위한 문자’로 문자와 삽화의 관계에 집중하여 전시 주제를 명료하고도 단순 해석하기 쉽도록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1부는 국립문자세계박물관 소장품인 <손으로 그린 삽화: 기도서> 두 점을, 2부에서는 뒤러의 판화와 함께 조선의 천재예술가 단원 김홍도의 <오륜행실도언해>, <부모은중경>이 전시된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디지털 세상의 문자와 그림의 상관관계를 현대미술로 해석한 크리스 로(Chris Ro)의 작품 <부재의 존재>를 통해 문자와 그림의 공생, 의사 전달 수단으로써 그림의 역할에 대해 관람객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전시 전경 [필자 제공]
방학 기간이라 전시장에는 엄마 손을 잡고 온 어린 친구들로 북적였다. 복잡하고 난해한 수수께끼 같은 뒤러의 판화에 비해 어렵지 않은 전시 구성과 차분한 컬러의 전시디자인은 개구쟁이 어린 친구들도 차분히 도슨트 선생님의 설명에 귀 기울이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전시 곳곳에 마련된 체험프로그램 또한 어린 친구들이 박물관을 편하고 안정되고 특별히 즐거운 곳으로 인식하도록 하기에 너끈하였다. 특히 <아담과 하와>의 원본과 본 작품보다 가로 세로가 각각 0.2cm씩 큰 오류인쇄본인 희귀본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 천재예술가의 실수도 자부심으로 승화하는 뒷이야기를 듣고, 흑백이 아닌 컬러 작품이었으면 어땠을까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준 대형 미디어 작품을 통해 아담과 하와를 색다르게 느낄 수 있었다.
알브레히트 뒤러, 아담과 하와, 흑백 미디어작품 [필자 제공]
알브레히트 뒤러, 아담과 하와, 컬러 미디어작품 [필자 제공]
어린 친구들이 자신만의 재미를 찾고 전시장을 빠져나가고 난 후, 곧 찌를 듯이 세밀한 뒤러의 판화 작품들을 찬찬히 읽어보고 마지막 에필로그 존으로 향하였더니 또 다른 흥미로운 장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무빙 이미지를 바탕으로 선택한 특정 장면들을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함을 선사하는 크리스 로의 이미지 작업에 의해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겹겹의 레이어를 만들어 독창적인 무드를 만들어냈다. 멜랑콜리한 기분을 느끼게 했던, 알싸한 겨울을 느낄 수 없도록 만든 그 온도마저 환상적인 분위기로 느끼게 해 준 것이다. 참 놀랍지. 작품이 가진 능력이란 전시의 힘이란….
(좌)(우) 크리스 로, 부재의 존재 장면 [필자 제공]
(좌)(우) 크리스 로, 부재의 존재 장면 [필자 제공]
예술적 기술과 지적 능력의 집합체인 뒤러의 판화 작품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게 되었다. 마르실리오 피 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는 “우울이 없이는 창조적 상상력도 기대할 수 없으며, 모든 창조는 이것으로부터 연유한다.”라고 말했다. 물론 예술가의 우울함이 천재성을 강화해주는 절대적인 요소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뒤러의 우울감은 위대한 예술의 창조적이며 독창적인 영감이 된 것을 확인했고, 뒤러의 판화를 통해 본 전시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했던 <문자와 그림의 관계성>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멜랑콜리아 Ⅰ> 속 뒤러의 영적 자화상인 그녀처럼 ‘멜랑콜리 포즈’를 취하고 골똘히 생각해본 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우사라 (禹思羅, Sarah Woo)
부평구문화재단 예술교육팀 팀장. 큐레이터.
한국화와 예술경영을 공부하였다. 커머셜 화랑, 옥션하우스, 비엔날레, 기업 메세나 갤러리의 경험을 밑천으로 부평구문화재단에서 전시와 예술교육 총괄을 맡고 있다. 지역미술시장과 지역 여성 노동미술에 대한 관심으로 탐닉하며 즐겁게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끝은 절대 쓰지 않을 달고도 흡족한 결과물로 다시 만나기를 소망하며…
woocu17@bpc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