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 달문을 찾아서> 포스터
극단 집현의 <광대, 달문을 찾아서>를 떠올리니 얼마 전 세상을 버린 배우가 다시금 생각나 새로 가슴이 먹먹하다.
광대 ‘달문’은 우리에게는 연암 박지원의 「광문자전」의 ‘광문’이로 더 많이 알려진 조선 후기 실존인물이다. 가난한 거지였으나 어질고 지혜롭고 정직했으며 예술을 이해하고 자유로웠으며 웃음과 기쁨의 중요성을 아는 특별하고도 특별한 예인이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의 이름에 기대어 헛된 음모를 꾸미다가 들통난 이들이 있어 억울하게 유배살이를 했으나 1년여 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곧 그의 종적은 찾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연암은 「광문자전」의 후기에 유배에서 돌아와 자신이 떠난 후의 일을 물으며 서운한 기색이던 광문이 머리털이 다 빠져 쥐꼬리처럼 땋아 늘인 머리모양에, 이가 빠져 입이 오므라든 까닭에 주먹을 넣을 수도 없게 된 초라한 행색을 안타까움으로 덧붙여 두었고 <달문가>를 지은 홍성유는 그를 신선에 견주면서도 ‘지인은 무명을 귀히 여긴다(至人貴無名)’고 평하였었다.
말하자면 달문이와 같은 기이한 인물을 끝내 용납하지 못하고 종적을 숨기도록 만든 것이 조선 후기의 각박한 세태였던 것인데, 오늘날은 종적을 감춘 달문을 찾아내기는커녕 죽음으로 몰고 가, 확인사살하는 더 지독한 세상이 아닌가.
연극 <광대, 달문을 찾아서>
근래에 들어 달문이에 주목한 작품이 더러 눈에 띈다. ‘달문’이와 같은 진짜 광대를 기다리는 마음이 한결같은 까닭이리라. 김영주의 광대 달문(문학과지성사, 2015)은 청소년도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쓰인 작품이고 김탁환의 이토록 고고한 연예(북스피어, 2018)는 조선 후기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토대로 씌어진 흥미로운 풍속사 소설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달문이의 활약과 가치를 읽기에는 좋아도 달문이의 절망과 슬픔, 오늘을 사는 달문이들의 고통과 좌절을 충분히 보여주지는 못한다.
201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시행하는 공연예술창작산실 대본 공모 분야에서 선정된 하우(신광수)의 희곡 <달문을 찾아서>는 말 그대로 ‘달문’이 없는 세상에서 ‘달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이 작품 속의 달문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배에서 풀려나 종적을 감춘 것이 아니라 이미 효수되어 용수 쓰고 저잣거리에 목이 걸렸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믿지 않고 그의 죽음을 의심하며 전기수 영감의 이야기 속에서 간절하게 달문을 찾는다. 백성들과 이야기꾼과 춤추고 노래하는 기녀들이 한마음으로 광대 달문을 찾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연극 <광대, 달문을 찾아서>
이 작품에서 아쉬운 것은 이 도전적인 질문에 다소 상투적인 해답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대답이 개연성을 지닌 사건으로 구축되어 관객의 결단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가면을 쓴 캐릭터의 출현으로 성급하고 어정쩡하게 선언되고 만다.
‘찾기’는 ‘되기’로 이어져야 비로소 완성된다. ‘배트맨’이나 ‘조로’와 같은 캐릭터가 끝내 스크린 너머에 있는 것은 그들이 ‘누구’인가에 관객의 관심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면’ 너머에 진짜가 숨어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바꿔 쓰는 천 개의 가면은 모두 우리 자신이다. 가면을 쓴 ‘달문’의 캐릭터가 관객에게 더 이상 궁금하기보다는 ‘달문’의 얼굴을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 얼굴에 겹쳐놓고 싶을 때, 대답이 완성된다.
연극 <광대, 달문을 찾아서>
극단 집현의 <광대, 달문을 찾아서>는 이 한계를 배경 그림으로 보완하고자 하였다. 막이 오르면서 무대는 효수된 목이 걸린 비장한 그림으로 가득 찬다. 마치 갑오년에 효수된 동학도들과 같다. 달문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적시한 효과는 상당하다. 달문이 죽었으나 채령이를 지키기 위해 출몰하는 존재, 채령의 꽃신을 소중히 간직하는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작에서 ‘달문’과 갈등하는 주체가 부패한 왕과 관리, 요컨대 정치적 권력자들이라는 점은 결국 ‘달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머물게 한다. 사실 이러한 한계는 이 작품이 사건과 인물의 행동으로 인물을 구축해가는 것이 아니라 인물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채령이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 없는 좌의정의 잔치판에서 춤을 추지 않으려 하다가 다리가 부러졌으니 그 좌의정은 기실은 채령의 아비였고 어미는 같으나 아비가 다른 오라비는 동생이 기생이라고 절연을 선언했다. 사실의 맥락과 개연성을 따지는 일은 여차로 두더라도 채령이란 캐릭터를 구성하는 이 중차대한 정보들은 채령이 자신도 아니고 모두 이야기꾼들의 구설로 제공된다. 그런데 이러한 채령의 혈연관계가 채령이가 검무를 잘 추는 예인으로 다리가 부러진 이후에도 달문을 만나서는 우화등선하듯 춤을 출 수 있었다는 사실과 무슨 상관일까?
채령이가 대대로 관비에게서 태어나 필연적으로 기생이 되었다 해도 그녀의 춤은 이해받을 권리,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연극 <광대, 달문을 찾아서>
“내가 달문이오!”
“우리 모두 달문이오!”
이 정답은 지난 시기, 얼마나 우리들의 심장을 울리게 했던가. 우리는 모두 ‘말콤X’였고 ‘전태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안다. 선언은 오히려 쉽고 목숨을 거는 것도 결국은 오히려 쉽다. 어려운 것은 우리가 ‘말콤X’로 ’전태일‘로 사는 것이었다.
더욱이 ‘달문’임에랴. 달문이가 되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 죽는 것이 아니라 채령이의 춤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그리하여 끝내는 그녀를 지킴으로 달성된다. 그러므로 질문은 다시 ‘어떻게 우리는 채령이를 춤추게 할 수 있는가’로 돌아가야 한다. 때로 어리석은 권력이 주먹까지 들어가는 우리들의 입을 막고 광대를 탄압하고 죽이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함께 춤출 수 있어야 혁명이다. 서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절로 춤을 이루는 세상, 우리 모두 달문이에 이르는 세상은 우리 모두의 꿈이다. 누가 감히 막을 것인가.
연극 <광대, 달문을 찾아서>
극단 집현은 1981년 전무송, 심평택 선생의 주도로 창단된 이래 43년 성상을 이어온 저력 있는 극단이다. 인천에서 시작했으나 인천에 머물지 않으려 노력했고 끝없이 활동의 지평을 넓혀왔다. 끈기 있는 작업방식과 화려한 퍼포먼스는 극단 집현의 특장인바, 하우의 <달문을 찾아서>는 극단 집현의 스타일과도 매우 잘 맞는다. 하여 원작이 지닌 한계를 넘어서는 데 좀 더 천착하기를 희망한다. 연극이 좋은 것은 다시 해도 새 공연이라는 점이다. 레퍼토리를 쇄신하면서 지속적으로 텍스트 너머에서 극적 진실을 찾던 집현의 끈기로 더 깊어진 해답에 도달하기 바란다. 우리는 어떻게 달문이가 될 것인가?
이미지 제공: 극단 집현
윤진현 (尹振賢, Youn Jinheon)
문학박사, 연극평론가. 저서로 『조선 시민극의 구상과 탈계몽의 미학』(창비), 『공연을 이해하면 인간이 사랑스럽다』(다인아트), 『희곡, 어떻게 읽을 것인가』(연극과인간), 『백범을 읽는 200가지 방법』(다인아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