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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춤의 되 삶 그리고 이어짐

공연 <일이관지 一以貫之>

양종승

2023년 10월 26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는 민천식과 양소운의 해서춤이 신명을 북돋는 감흥의 판 위에 올려졌다. 해서(海西)는 지리적으로 한반도 중부에 해당하는 서쪽 해안지방 즉, 황해도 일대를 말한다. 이 지역의 춤 문화는 경기지역이나 호남지역과 같이 시나위 문화권에 담겨있다. 그래서 해서춤은 ‘해서 시나위(일명 삼현이라고 함)’를 담보하여 독특한 형태를 지닌다. 국립국악원이 꾸민 <일이관지 一以貫之> 조선 춤방에서 두 명무의 후계자들이 해서춤 면모를 그려냈다.

일이관지 무용 ‘조선춤방’ 포스터

일이관지 무용 ‘조선춤방’ 포스터
(자료 제공: 국립국악원)

민천식 춤방에서 전승된 화관무와 해주 수건춤

민천식 춤방의 화관무는 양우선(兩雨線)에 의한 한삼 놀림으로 고고한 북방계통 예술세계를 그린다. 화관을 쓴 무희들이 재생과 영생을 소망하며 달 모습으로 상징화한 원진무(圓陣舞) 구도를 그려내어 장엄하고도 엄격한 손놀림과 발디딤의 기법을 그려낸다. 궁중춤과 민속춤을 버무려 탄생시킨 것이기에 그렇고, 그로써 민천식류 대표적 춤으로 전해지면서 화관무가 갖는 위상을 더욱 드높이게 된 것이다. 해주 수건춤 또한 깊다란 내면으로부터 뽑아 올린 긴 여운의 춤사위가 해서 시나위에 얹어져 절제된 신명을 표방한다. 여밈사위와 꺽는사위 등으로 요염함과 도도함을 뽐내며 짜릿한 멋을 한층 고조시킨다. 이렇듯 민천식 춤은 기교보다는 자연미가 우선시되며 여린 맛을 돋워내는 풋내기 맛을 갈구하는 특징이 있다. 민천식이 남긴 춤은 이 외에도 바라춤, 성진무, 화관무, 태평무, 승무, 검무, 북춤, 부채춤, 학춤, 장고춤, 기방무, 살풀이춤, 용춤, 황진이춤, 굿거리춤, 입춤 등이 있다.

민천식춤방_화관무

민천식춤방 화관무
(사진 제공: 국립국악원)

민천식춤방_해주수건춤_김나연 춤 시범

민천식춤방 해주수건춤 김나연 춤 시범
(사진 제공: 국립국악원)

황해도 사리원에서 출생한 민관식(남, 예명 민천식, 1898~1967, 국가무형문화재 봉산탈춤 보유자)은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능이 알려져 애기 명인으로 불렸다. 일찍이 고향의 향토예술 지킴이 후계자가 되어 탈춤은 물론이고 춤, 소리, 악기 연주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장악원이 교방사로 바뀌고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가 생기자 곧 입학하여 궁중정재 등도 배웠다. 낙향 후 해주와 개성 권번에서 가르쳤는데, 최승희가 찾아와 춤을 배웠다. 한국동란 때 남하하여 인천국악원장을 지냈고, 후배 김천흥(남, 1909~2007, 전통춤 및 궁중정재 계승자) 등과도 교류하며 폭넓은 예술 활동을 펼쳤다. 1961년 봉산탈춤 복원 때 김진옥, 이근성, 양소운 등과 힘을 합쳐 한국봉산가면극연구회를 조직하였다. 봉산탈춤의 국가무형유산 지정과 더불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지만, 같은 날 사망하여 이름 석 자가 묻히고 말았다. 근년에 비로소 해서춤으로 소환되어 민천식 춤 유산이 알려지고 그의 업적 또한 되새기게 된 것이다.

민천식 춤방에서 학습한 황해도 연백 출신 김나연(여, 본명 김영자, 1939년생, 황해도무형문화재 화관무 명예보유자)은 아동 때부터 춤 재능이 널리 알려졌다. 초등학생 때 유희단에 뽑혀 활동하기도 하였고,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면 가족 친지 앞에서 춤 자랑을 뽐내기도 하였다. 12살 때 부모와 함께 인천으로 온 후 민천식 춤방에 입문하여 화관무, 해주 수건춤 등 해서춤을 사사하였다. 2011년 화관무가 이북5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되자 보유자 반열에 올랐고, 그의 제자이며 친녀 차지언(여, 1969년생, 황해도무형문화재 화관무 보유자, 황해도화관무보존회장)이 뒤를 잇고 있다.

양소운 춤방으로 이어져 온 해주 검무와 승인인상무

한국동란 때 남하한 황해도 재령 출신 양소운(여, 1924~2008, 국가무형문화재 봉산탈춤 보유자)은 봉산, 강령, 은율 등 해서탈춤 고증과 복원에 참여하고 전승자로서 소임을 다 했다. 그러나 양소운은 탈춤뿐만 아니라 서도소리 명창이요 해서춤 명무이기도 하였다. 서도창 배뱅이굿을 비롯한 해주 검무와 승인인상무를 통해 양소운의 깔끔하고 담백한 해서 예술의 참모습을 느낄 수가 있다. 대소삼(大小衫)의 호흡을 얹은 강속부절(繈屬不絕) 디딤에서는 명확한 메김과 맺음 그리고 끊음과 이음의 춤새를 내뿜으며 양소운류만의 춤새로 긴장을 조인다. 그녀의 스승 장양선은 예술단을 꾸릴 정도로 해서 지역의 명인이었다. 스승을 따라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며 구전심수의 예술혼을 넘겨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권번에서 조교로 활동하였고, 박동신(남, 1909~1992, 국가무형문화재 강령탈춤 보유자)와 함께 강습소를 운영하며 해서 악가무극을 가르쳤다. 한국동란이 일자 대구로 남하하였다가 1956년 인천에 정착하여 인천고전무용학원을 개원하였다. 해주 검무와 승인인상무를 비롯한 즉흥무, 한량무, 팔선녀춤, 가인전목단, 포구락, 무고 등을 가르치면서 인천 춤 예술의 격을 한층 드높이며 해서 예술을 계승하였다. 양소운 춤방의 으뜸 제자 차재숙(여, 1947년생, 양소운의 친딸, 해주검무보존회장)은 해주 검무 전승과 발전을 위해 온 힘을 다한다. 박일흥(남, 1957년생, 국가무형문화재 은율탈춤 보유자, 승인인상무보존회장) 또한 스승의 뒤를 이어 승인인상무 등 해서 무형유산을 전파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해주 검무의 형태와 음악은 독창적이다. 억제력과 절제력에 공을 들여 정중동 미를 풍기고 쌍대를 이루는 검무의 위엄을 드높인다. 해서 시나위의 느린타령, 잦은타령, 빠른타령을 연주하며 옆사위, 미는사위, 손돌사위, 공중사위, 반듯사위, 손앞사위 등의 손춤과 부채사위, 돌사위, 번개사위, 앞사위, 떡뫼사위 등의 칼춤으로 해주 검무만이 갖는 독특한 멋과 맛을 드러낸다. 스승의 예술적 유지를 받들어 해주 검무 발전을 위해 열정을 내뿜는 차재숙 명무는 해주검무보존회 회장으로 그리고 해서 춤방의 사범으로 스승 뒤를 이으며 해서춤 역사를 쓰고 있다.

해주검무

해주검무
(사진 제공: 국립국악원)

불도 세계를 인간 마음으로 그려내는 승인인상무(僧人印象舞)는 장삼춤을 추고 법고를 친다. 꽹과리를 연주하고 회심곡을 부르고 바라춤도 춘다. 그리하여 장삼을 벗어 재치고 세속의 춤을 추어 신명을 돋운다. 사월 초파일 절 행사에서 추어졌고, 여러 탈 판의 본 놀이 시작 전에 앞놀이로 추어졌다. 독무나 쌍무 또는 다섯 방위로 오방승인인상무로 추기도 한다. 해서 시나위의 염불, 허튼타령, 굿거리로 춤을 이어가면서 경쾌하고 장엄한 엎을사위, 치킬사위, 양사위, 곱사위, 연풍대 등의 춤새들을 펼쳐 보인다. 스승이 남긴 승인인상무를 올곧게 전승하는 박일흥 명인의 고군분투 모습이 장하다.

민천식과 양소운이 남긴 해서춤은 인천 문화예술계에 녹아들어 지역 춤 유산 밥그릇을 한층 격 있게 만든다. 유산이란 전달자 정신적 기억과 육체적 움직임으로 과거를 소환해낸 것이다. 그 기억 속에는 타인의 동의적 각인이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 표출되는 춤새 하나하나에는 신명과 감흥을 풍겨야 한다. 이를 증명해 보인 것이 두 명무의 춤방으로부터 전해져 그 제자들에 의해 꾸려진 조선 춤방 무대였다. 이는 우리 것 가꾸기와 지키기에 몰두한 두 명무의 예술적 사명과 의지가 인천 예술계에 정착돼 해서춤으로 되살아 난 것이다. 두 명무는 마치 운명이 시대와 맞닿아 미래를 항해 질주하듯, 인천을 남북문화 교두보로써 그리고 문화다양성을 추구하는 문화예술 도시로써 높은 명성을 잇게 하는데 일조한 것이다. 인천으로부터 불붙은 해서춤 유산이 민천식과 양소운 두 명무 이름으로 각인되었고, 그들의 정신이 이 시대의 예술적 사상과 철학 속으로 녹아내려 내일을 여는 창조적 춤의 길잡이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양종승

· 민속학자
· 샤머니즘박물관장
· 민속기록학회장
· 한국전통춤협회 수석부이사장
· 이북5도무형문화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