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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자란다, 마분리공동체 품에서
고영직
영화 <귀신>, 아이들 인생의 필모그래피
첫눈이 살짝 내린 11월 17일, 인천 부평구 부개동 마분공원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우리마을영화사’가 주관하는 영화 <귀신>(러닝타임 22분) 제작 발표회가 진행된 것이다. 아이들이 부개동·일신동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동네 이야기를 발굴해 제작한 영화 <귀신>은 억울하게 죽은 귀신의 한(恨)을 풀어주는 이야기라고 한다. 아이들은 ‘꿀잼’은 보장하지 못하지만, 반전 매력이 있는 영화니까 꼭 관람해달라고 연신 호객 행위를 한다. 영화는 옛 조병창 기찻길, 일신시장, 마분공원 등 부개동·일신동 일대에서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되었고, 전문 연극배우를 비롯해 동네 어른들이 여럿 우정출연했다.
2023. 11. 17. 영화 <귀신> 제작발표회 ©마분리공동체
영화 <귀신> 제작 발표회는 인천문화재단 꿈다락 사업 <우리마을영화사> 프로그램에 참여한 12명의 아이들이 스스로 기획하고 진행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또래 친구들과 학부모 그리고 부개동·일신동 일대 주민 등 100여 명이 넘는 관객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이 된 아이들은 떠들썩한 말썽꾸러기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한껏 상기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의젓한 모습을 끝내 잃지 않았다. 상영회 전부터 무대 설치를 돕고, 배역이 적힌 자신의 명함을 또래 친구들에게 돌리며 행사장을 안내하는가 하면, 상영회 후 가진 관객과의 대화(GV)까지 멋지게 소화했다. GV 행사에서는 극중 인물(서준)이 ‘차이는’ 장면에 집중되었다. 아이들은 어쩌면 인생에서 잊지 못할 필모그래피(filmography)를 멋지게 작성한 것인지도 모른다.
촬영현장 답사 ©마분리공동체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국가가 필요하다, 라고. 저출생·고령화 문제를 누구나 입에 올리고, 지역 소멸과 인구 소멸을 걱정하지만, 좀처럼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 그런 점에서 스페인어 푸에블로(pueblo)라는 말에 ‘마을’이라는 뜻과 ‘사람’이라는 뜻이 동시에 있는 이유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 ‘마을은 사람이다’라는 의미인 동시에, ‘지역은 사람이다’라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사는 지역에서 과연 ‘지역은 사람이다’라는 명제가 제대로 작동하는가? 어린이 또는 어린 시민을 귀하게 존중할 줄 알아야 하고, 젊은 여성을 비롯해 청년들이 마음껏 활보하고 활개 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오래전에 말무덤[馬墳]이 있는 동네여서 ‘마분리’라는 지명이 아직 도시화석(化石)으로 남아 있는 마분리공동체가 주관한 <우리마을영화사>에서 작은 희망을 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아이들은 안전한 마을에서, 서로 안심하며, 마을 사람들과 안녕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자란다. 마분리공동체(대표 김연명) 품 안에서!
“우리도 영화 만들 수 있어!”
앞서 언급했지만, <우리마을영화사> 프로그램은 아이들의 자유의지가 제대로 발휘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한마디로 말해 아이들의 주도성이 잘 드러났다. 지난 여름부터 장비 실습, 창립식, 주민 인터뷰, 시나리오 작성, 주민 오디션, 촬영 및 제작 발표회까지 한 기수로 24주 동안 진행되는 동안 아이들은 스스로 이 모든 과정을 주도했다. 어른들은 영상 편집 등 전문 분야에서 주강사인 라정민 선생이 도움을 주고, 마분리공동체 박상희 팀장 등이 진행 과정에서 아이들을 가슴에서 나온 돌봄을 베푸는 정도였다.
그런 탓일까. 아이들은 마분리공동체를 동네 아지트로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면 스스로 찾는 장소가 된 셈이다. 마분리공동체의 공기가 여느 동네와 다르다고 느낀 것은 이곳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감할 것이다. 유독 토박이가 많은 부개동·일신동 일대 주민들 또한 길을 지나다 문을 열고 “뭐, 도울 일 없어?” 하며 묻고 간다. 하지만 문화예술교육에서 아이들의 주도성을 십분 존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기획자, 주강사 등 참여한 어른들이 엄청난 ‘인내자본’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 지난 10월 말 마분리공동체를 방문해 세 시간 동안 수업을 참관하는 동안 아이들은 쉴 새 없이 고함쳤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아이들은 영화 <귀신> 제작 발표회 준비를 위해 제 할 일을 척척 진행했다. 촬영 과정에서도 그렇게 장난치고 떠들던 아이들이 막상 슬레이트를 치면 집중했다고 한다.
촬영장비를 익히기&직접 촬영 진행 ©마분리공동체
<우리마을영화사>는 아이들이 A부터 Z까지 스스로 주도하는 ‘프로듀서형’ 프로그램이었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른 마분리공동체 박상희 팀장과 주강사 라정민 선생의 협업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마분리공동체는 2023년 국토부 균형발전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받는 등 도시재생과 주민조직 사업으로 주민들의 신뢰를 얻고 있는 단체였다. 부개초등학교 출신인 박상희 팀장은 “아이들이 우리도 이런 걸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한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박 팀장의 아이 또한 이제 엄마 눈치를 보지 않으며,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으로 변했다. 박상희 팀장은 동네에 소재한 동수초등학교의 도움을 받아 전교생을 대상으로 영화 <귀신> 상영회를 열었다. 아이들은 “학교생활 망할 수도 있다”며 엄살을 피웠지만, 상영회 이후 쏟아지는 아이들의 관심이 싫지 않은 듯했다. 동수초 상영회에는 200여 명의 또래 아이들이 관람했으며, 출연한 아이들을 둘러싸고 칭찬과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고 한다. 질문은 역시나 극중 상대에게 ‘차이는’ 장면이었다는 후문이다.
마분리공동체 영화제작 프로그램 -‘우리마을영화사’ 영화 <귀신>
우애로운 마주침은 계속된다
주강사인 라정민 선생 또한 아이들이 수업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과 분위기를 만드는 데 공을 들였다. ‘도둑맞은 집중력’은 어른들만의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촬영할 때는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파트별로 2시간씩 세 차례 진행하고,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역할을 고루 안배했다. 시간과 노력을 더 투입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보조강사인 이근오, 주희 선생이 ‘치트키’ 역할을 하며 한시름 놓았다. 특히 이근오 선생은 아이들이 ‘그노그노송’을 만들어 부를 정도였다. 하지만 귀에서 피가 나도록 고함치고 아우성치는 아이들 때문에 ‘기가 빨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학부모님들과의 일상적인 소통이 도움이 되었다. 라정민 선생은 “처음부터 아이들이 동네 어른들과 만나게 하고 싶었다. 상처받기 쉬운 아이들이 동네에서 당당하게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말썽쟁이, 꼬맹이 정도로 생각하지 마시고,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한다”고 소감을 말한다.
우리마을영화사 수업 회차중 ©마분리공동체
프로그램은 끝났다. 김규리 어린이는 “내레이션 녹음을 처음 해봤는데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하나영 어린이는 “프로그램이 끝나 얘들을 만날 수 없어 섭섭하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영화 <귀신> 상영회의 추억은 끝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지금도 동네에서 수업 때 만난 어른들을 만나면 먼저 큰소리로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한다. 우애로운 마주침이 일상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누군가의 안녕을 묻는다는 것은 서로돌봄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내가 사는 마을에 대해 긍지(矜持)를 갖는 일은 그래서 소중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아이들이 확인한 것은 ‘나’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신뢰의 사슬이었을 것이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을 위하여.
고영직(高永直, Ko Young Jik)
문학평론가.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좋아 문학평론가가 되었다. 인문학 교육, 미적 교육, 문화예술교육에 관심이 많다. 『인문적 인간』. 『삶의 시간을 잇는 문화예술교육』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