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수연, 『함께 내딛는 찬찬한 걸음』, 소명출판, 2023.
최근 들어 인천 문학평론가들의 연이은 결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천작가회의 평론분과의 첫 모음집으로 『포스트휴먼 파노라마』(다인아트, 2021)가 나오더니 작년 말부터 강경석, 선우은실, 송수연, 문종필 등 인천 출신이거나 인천에서 수학한 작가들의 첫 평론집이 출간되었다. 오랜 시간을 겪어낸 그들의 비평적 고투를 ‘인천’이라는 한정사로 단순하게 제한해서는 안 되겠지만, 가을의 기쁨이 내 눈에 비치는 고향의 들판으로부터 번져오는 듯한 또렷한 실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올여름이 끝날 무렵, 화사한 봄꽃의 문양으로 표지를 물들인 류수연의 첫 평론집이 도착했다.
류수연은 2013년에 등단했고 이 책이 나온 것은 2023년이다. 등단 이전에 쓴 두 편의 글을 제외하면 10년간의 결실을 모은 것이다. 그 10년은 박근혜 정권의 출범으로 시작해서 세월호 참사와 페미니즘 리부트, 촛불광장과 코로나19를 경험한 기간이었다. 고통을 통곡으로 해소하지 못한 애도의 밀실에서 질서 정연한 백만의 광장으로 쏟아져나온 민주주의 열기가 찬란한 성과를 거두었다가,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바이러스의 급습에 골목까지 비워갔던 시기였다. 그사이 웹플랫폼에 기반한 온라인 환경이 인공지능에 기반한 웹3.0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줌 어플을 활용한 회의가 자연스러워졌다.
류수연의 평론은 그러한 당대의 사회 현상에서 출발하여 억압된 과거의 역사적 장면과 현재의 작품(들)을 잇고 미래의 가능성을 포착한다. 단일하다고 여겨졌던 기억은 작품을 독해하는 와중에 갈라져 억압되어 있던 동일한 현실의 다른 기억과 연결되고, 그 기억의 왜곡과 삭제 속에서 실종되었던 타자의 삶은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등단작 「통각(痛覺)의 회복, ‘이름’의 기원을 재구성하다」에서 류수연은 이렇게 단언했다. “기억에서 ‘실종’되어버린 시간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억의 왜곡을 자각해야만 한다”고. 다소 단순한 예를 든다면, 어떤 평론에서 촛불로 밝혀진 광장은 세월호 참사의 기억으로 이어지고, 세월호 참사의 기억은 다른 평론에서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과 연결된다. 이러한 고통과 진혼의 연대는 한강의 작품 『소년이 온다』 인용을 관통해 용산 참사를 끌어안는다.
그러니 이 평론집에 실린 비교적 초기의 글들에서 ‘잉여’와 ‘부재’라는 단어, 즉 타자성을 대표하는 존재론의 양극단에 선 단어가 작품 속에서 유사하게 다뤄진다고 해석되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과잉으로 치부된 존재자(잉여)와 존재의 희소성(부재) 모두 속물적 실용주의의 효율성을 기준으로 절단되어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그들이 비좁은 경계 바깥을 두려워하면서도 서로를 바라보고 손을 내밀고, 때로는 경계 안에서 몸부림치며 치열하게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것은 편안하게 바라볼 일이 아니다. 합리성으로 치장한 칼날 같은 시선이 자신을 다른 어떤 것에 통합시키려는 지속적인 억압 속에서 온몸으로 바라보고 온 힘으로 손을 내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전은 지루할 정도로 느리고 ‘계몽된 지구의 재앙’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소수자의 틈입을 차단하는 보편의 담론이 자신의 무능을 유능함으로 위장하기 때문이다. 보편의 담론은 잉여와 부재로부터 회복된 소수자의 (비)언어를 담지 못하는 무능을, 동정과 연민의 위계 하에서 소수자를 받아들이는 척하거나 차갑게 내침으로써 유능함을 위장한다. 그러니 그러한 보편의 한계가 류수연이 살핀 작품 속에서 부정방정식(「생존이라는 부정방정식」)이나 이중부정의 연쇄(「이중부정의 세계, 광인의 논리학」)로 표현된다고 해도 답답해할 필요는 없다. 현재의 언어로 풀지 못하는 미지(未知)의 언어를 서둘러 독해하기보다는, 미지가 또 다른 미지와 만나 조우하는 광경을 류수연 평론이 제안하는 낙관적 가능성과 함께 바라보아도 좋을 것 같다.
“가장 건강하고 능동적인 가능성”을 “불온성”에서 도출하는 이 평론집의 첫 평론, 「2020년, 우리는 무엇을 노래했는가?」를 잠깐 살펴보자. 코로나19의 현실에서 미투 운동과 관련된 시로 넘어가며 류수연은 두 편의 시를 인용한다. 주민현의 「철새와 엽총」에서 다른 문화에서 자라온 두 여성이 나란히 음식을 먹는 객관적인 장면은 이용임의 「시계의 집」에서 “순결한 네 이마에서/ 불온한 자궁의 무늬를 읽는” 마주 본 상황의 주관적인 시야로 이어진다. ‘그녀’의 노래가 ‘내’ 발바닥의 글씨로 전환되는 주민현의 시와 저녁 종소리가 잉태로 전환되는 이용임의 시는 서로 다른 문화에서 살아왔기에 생긴 타자성과 불온함이라는 낙인을 지니고 생애를 함께한 여성성을 동일한 연대의 장면으로 제시한다. 짧은 분량으로 인해 충분히 해명되지 못한 해설의 여백을 두 시의 배치로 독자가 음미하고 새로운 삶을 꿈꾸게 해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백하자면, 나는 짧은 분량을 핑계로 류수연 평론집이 다룬 광범위한 영역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했다. 특히 평론집 전체를 흐르는 여성주의적 주조음과 류수연 평론집의 특장인 ‘제5부 트랜스미디어 시대의 문학’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한 아쉬움이 짙다. 그렇다고 해서 류수연처럼 배치를 통해 독자 스스로 깨닫는 여백과 여운을 남기지도 못한 듯하다. 추상적인 어휘의 남발에 분노할 독자에게 양해를 빌며 이 평론집을 읽어볼 것을 추천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재용
문학평론가, 웹진 계간 『작가들』 편집 주간. 대표 평론으로 「황순원 문학에 내포된 타자의 세 고리」 「포스트휴먼 시대의 별유천지비인간」 「강경애 문학의 대상 a와 인천」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