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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통신 3.0 기획 1: 인천 구도심의 문화적 활성화>
인천문화통신 3.0은 2022년에 ‘문화도시’와 ‘포스트 코로나’를 주제로 기획 연재를 진행한다.
4월호 기획 인터뷰가 진행된 동구 배다리의 문화공간을 스케치로 남긴 ‘롤라장 어반 스케치’의 작품을 지면으로 만나 본다. – 편집자 주 –
천천히 함께 그물을 엮는 배다리 사람들
: 문화상점 동성한의원 권은숙 대표
2022.03.28. 박수희
침과 뜸으로 치유하던 동성한의원, 나눔과 비움으로 배우는 ‘문화상점’으로 새 단장 하다
배다리 삼거리에서 창영초등학교로 오르는 우각로 변에 질 좋은 돌과 타일로 잘 지어진 2층 건물 동성한의원이 늠름하게 서 있다. ‘의료보험, 요양기관’ 푯말과 진료안내판까지 떡 붙어있지만, 지금 이곳은 한의술을 펼치는 의료기관이 아니다. 눈을 크게 뜨고 잘 봐야 찾을 수 있는 작은 간판을 통해 이곳이 한 지붕 다섯 가게가 운영하는 ‘문화상점 동성한의원’이란 걸 알 수 있다.
문화상점 동성한의원은 오랫동안 공유공간을 실험해 온 권은숙씨가 2008년부터 배다리에 둥지를 틀면서 만든 세 번째 공유가게다. 배다리 사람들은 ‘권은숙 씨’라고 하면 잘 모르고, ‘청산’이라고 해야 안다. 환경운동을 하면서 지은 별명이 ‘청산별곡’인데, 줄여서 ‘청산’이라고 부른다.
문화상점 동성한의원
청산과 반려묘 반달이
청산은 1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밀레니엄이 시작되던 2000년부터 환경단체 ‘풀꽃 세상을 위한 모임’에서 사무국 간사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환경운동을 펼쳤다. 도시를 벗어나 강원도 시골 빈집에서 4년간 머물다가 부모님이 계신 인천으로 돌아왔다. 환경운동과 시골생활의 경험을 살려 도시에 살면서 공간을 함께 나누는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해보기로 했다.
미추홀구 수봉산 자락에 공유 주거 공간 ‘앵두나무집’을 시작으로 배다리에 첫 번째 공유가게 ‘작은 상점, 나비날다’를 열었다. “배다리는 학창시절부터 자주 찾던 곳이에요. 헌책방골목이니까 책을 읽을 공간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누고 비운다’는 삶의 철학을 담아 지은 ‘나비날다’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함께 궁리했다. 이름 때문이었을까, ‘나비날다’는 사람과 길고양이들의 보금자리가 되었고, 청산은 고양이들의 집사가 되었다.
조흥상회 독립책방 나비날다
배다리 마을로 가는 교실 전시회
“머리방 사장님과 아벨 사장님의 소개로 배다리 초입에 있는 조흥상회 건물을 임대해서 더 다양한 공유공간 실험을 할 수 있었어요.” 건물 1층 전면 상가에 배다리 안내소 겸 독립책방 나비날다를 만들어 무인가게로 운영하고, 2층과 안채는 생각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사용하고 조흥상회 주인집이 남기고 간 생활용품들을 정리해서 생활사박물관을 꾸몄다. 조흥상회의 창고로 사용되던 붉은 벽돌 건물은 요일별로 주인을 달리해서 운영하는 새로운 형태의 공유가게로 운영했다. 모든 것이 사부작사부작 손과 발을 놀려서 함께 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공간을 공유하는 공간 지기들, 배다리의 어르신들과 함께 다양한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배다리 마을축제, 생태공원 ‘여름 밭캉스’, 나눔 장터, 헌책방 페스티벌, 연말 쓸친소 파티, 독서 모임, 마을로 가는 교실, 북 토크, 문화강좌, 학생 탐방 프로그램 등 다양한 활동이 배다리 곳곳에서 펼쳐졌다.
조흥상회 독립책방 나비날다(15번 사진의 왼쪽 두 개)
1948년 이전에 지어진 조흥상회 건물은 살림채와 상가의 원형이 잘 보존된 근대유산으로 가치를 높이 인정받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지역문화 자산으로 보전, 관리하기 위해 매입했다. 청산의 두 번째 배다리 공유공간 시대는 그렇게 마감됐다.
세 번째 공유공간을 마련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배다리 사람들이 징검다리를 자처하여 동성한의원 1층을 임대하고 함께 공간을 꾸릴 드림팀을 꾸릴 수 있었다. 청산과 반려묘 ‘반달이’가 운영하는 독립책방 ‘나비날다’, 제로웨이스트샵 ‘슬로슬로’, 손뜨개 가게 ‘실꽃’, 빵과 쿠키를 굽는 ‘지유오븐’, 씨앗과 식물을 키우는 ‘뒤뜨레’가 느리고 어설프게 함께 공간을 만들고 사이좋게 입점했다. 문화상점 동성한의원은 각자의 취향과 개성을 존중하는 공유공간이자 책, 친환경 제품, 뜨개작품, 빵, 식물로 처방하고 치유하는 문화공간이다.
“마을 공동체를 꿈꾸고, 자연에 해가 되지 않는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함께 고민하고 있어요. 혼자는 부족하지만, 함께 힘을 내면서 배다리에서 오래오래 책방 하면서 살고 싶어요.”
가끔 침 맞으러 동성한의원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다. 그럴 때면 초록한의원을 안내해드린다. 사람이 사람으로 이어지는 곳이 동네다. 최근 동구에서 지원하는 ‘배다리 문화예술의 거리’ 조성사업으로 새로운 점포 30여 개가 금곡로와 우각로에 문을 열었다. 청산은 새로 배다리에 둥지를 튼 젊은이들이 동네에 잘 스며들 수 있도록 교류할 방법을 고민 중이다.
“제가 배다리에 자리를 잡을 때 앞선 어르신들의 도움을 받았듯이 저도 이제 새롭게 배다리에 스며드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따뜻한 봄날, 가게마다 문 앞에 작은 마켓을 여는 주말 골목길도 상상해보고, 배다리 젊은 새내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토크콘서트도 궁리 중이다.
“배다리가 관광을 위한 구경거리가 아닌, 공존의 가치를 서로 배우고 나눌 수 있는 동네가 되길 바랍니다.”
단순히 옛 모습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이 도시재생이 지향하는 바는 아닐 것이다. 오래 동네에 머문 지역 주민의 삶이 존중받고 지속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도시재생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동네에는 다양한 사람이 살고, 이웃과 함께하는 일상 속에 오랜 생명력을 얻는다.
글/사진 박수희 (朴秀姬 / Park SuHi)
건축을 전공했고 지금은 문화대학원에서 지역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시속 4km의 속도로 다채롭고 평범한 사람들의 공간과 일상을 걷고, 보고, 말하고, 읽고, 쓰고, 노래한다. 특히 오랜 시간과 성실한 손길이 담긴 것들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