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뷰

보다 말랑해질 경계의 가능성

렉쳐 퍼포먼스 <번역된 레시피> 리뷰

양세훈 (자유기고) · 윤소정 (부천문화재단)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많을 수밖에 없던 새내기 시절,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사는 곳은 어디예요?”라는 질문엔 늘 “20살 되자마자 남양주로 이사 갔는데, 초·중·고등학교는 다 노원에서 나왔어요.”라고 답하곤 했다. 이 대답엔 급작스러운 이사로 별안간 왕복 4시간 ‘통학러’가 되어버린 데에 대한 자조적 한탄도 서려 있었지만, ‘나’라는 사람에 대해 넌지시 알려주고픈 마음이 더 크게 작용했다. 4호선과 7호선을 중심으로 그어진 내 머릿속 서울의 지형도, 대형 학원가가 위치한 곳에서 보낸 무던한 학창 시절 등이 노원이라는 지명으로 어느 정도는 설명될 것이라는 기대심이었다.

이렇듯 자기소개 자리에서 사는 곳이나 출신지가 단골 소재로 등장할 수 있는 까닭은 지역이라는 개념이 내포하는 특수성에 대한 공통된 인식 때문일 터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구획된 지리적 경계에서 더 나아가, 실질적인 삶의 환경이자 조건으로서 지역이 개개인에 끼치는 영향을 감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맹모가 이사를 괜히 세 번이나 했을까!) 요컨대 부평의 소담한 독립서점에서 진행된 <번역된 레시피>는 이러한 ‘영향권으로서의 지역’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타자와 타문화에 대한 탈혐오의 가능성을 엿본 렉쳐 퍼포먼스라 하겠다.

『번역된 레시피』 출판물
『번역된 레시피』 출판물

『번역된 레시피』 출판물 / Ⓒ 박상은

조리법 이야기 아님 주의

제목에서부터 예상할 수 있듯 <번역된 레시피>의 주인공은 ‘음식’이다. 하지만 제목만 얼핏 보고 이국적인 미식 경험을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다소 당황할 수 있겠다 싶다. <번역된 레시피>의 관심은 음식 자체가 아닌, 그 뒤로 켜켜이 쌓인 작은 이야기들과 문화적 매개로서 기능하는 음식의 역할에 있기 때문이다. 부평에 거주하는 미얀마 이주민 4명과의 인터뷰로 출발한 이 프로젝트는 ‘리서치 → 출판물 → 렉쳐 퍼포먼스’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미얀마 이주민의 음식이 지닌 상호연결성에 주목한다. 동명의 출판물이 이국 음식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한국으로 이주한 미얀마 사람들의 삶에 관한 일종의 이야기책이었다면, 렉쳐 퍼포먼스는 이 개인들의 미시사에 잠재된 문화와 역사, 사회 현상 등으로 논의를 확장하는 방식이다.

다양한 재료가 한 데 섞여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의 측면에서나, 이만큼 문화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흔치 않다는 점에서나 ‘음식’은 <번역된 레시피>의 인식의 틀로서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렉쳐 퍼포먼스에 다층적 질감과 생동감을 불어넣는 건 바로 ‘미얀마의’ 음식이라는 사실에 있다. 네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오랜 시간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한 미얀마의 음식은 렉쳐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내내 탈경계적 주체로서 유동하는 문화를 이해하는 데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준다.

렉쳐 퍼포먼스 및 출판물 배포 현장
렉쳐 퍼포먼스 및 출판물 배포 현장

렉쳐 퍼포먼스 및 출판물 배포 현장 / Ⓒ 박상은

작은 질문으로 시작하는 지적 탐구

본격적인 막이 오르면, <번역된 레시피>는 다양한 미얀마 음식들의 변주 및 정착의 여정으로 참여자들을 초대한다. ‘와따힝’, ‘오노카욱쉐’, ‘모힝가’와 같은 이름조차 생소한 음식들을 소개되지만, 참여자들이 마주하게 되는 건 음식의 자세한 형태나 맛과 향 등이 아닌, 이들을 둘러싼 작은 질문들과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지적 탐구의 과정이다.

<번역된 레시피>는 영국의 식민 시절을 거치며 미얀마에 유입된 많은 이주민들, 그리고 독립 이후 모국으로 되돌아온 이주민들의 모습 등을 통해, 도시의 사회적 변화와 음식 사이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차분하고 성실하게 살핀다. 카레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 중국식 돼지고기 조림 ‘와따힝’에 붙은 ‘포크커리’라는 번역에선 제국주의의 시선을, 미얀마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코코넛밀크가 들어간 국수 ‘오노카욱쉐’에선 다른 문화권과의 교류의 가능성을 읽어내는 식이다.

특히 지역마다 고유한 조리법이 있어 지금도 변화하고 있는 요리 ‘모힝가’(생선 육수 베이스의 쌀국수)가 한국 부평에선 부평만의 특색을 반영하고 있음을 관찰하는 대목은 렉쳐 퍼포먼스의 탐구 영역을 ‘지금, 그리고 여기’로까지 안정적으로 확장시킨다. 다만, 미얀마 음식이 주는 생경함에 두 귀가 쫑긋하고 작은 질문 끝에 만난 넓은 세계에 몸이 앞으로 기욺에도,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양의 정보가 쏟아진 점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미얀마와 중국, 인도, 태국 등을 종횡무진 오가는 여정을 한 호흡으로 따라가기엔 다소 벅찬 감이 있었다.

웰컴 푸드로 준비된 사모사와 렉쳐 퍼포먼스 현장
웰컴 푸드로 준비된 사모사와 렉쳐 퍼포먼스 현장

웰컴 푸드로 준비된 사모사와 렉쳐 퍼포먼스 현장 / Ⓒ 박상은

흐려질 경계를 꿈꾸며

하지만 사실 이와 같은 아쉬움을 토로하는 건 <번역된 레시피>에게 온당치 않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어떤 음식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퍼져나갔는지, 또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에 대한 정보 전달은 <번역된 레시피>의 주안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아쉬움이 타당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기존의 것과 유입된 것이 공존하는 유동적 공간을 음식을 매개로 새로이 살펴보려는 시도, 이를 통해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를 말랑하고 흐릿하게 만들려는 시도, 궁극적으론 경계에서 발생하는 타자와 타문화에 대한 막연한 혐오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이러한 시도 자체에 <번역된 레시피>의 빛나는 의의가 있다고 말이다.

현재 지역문화진흥법에 근거한 문화도시 조성사업이 전국에서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각 지역의 고유문화를 조성하고 이를 통해 도시의 브랜드를 구축하여 사회경제적으로 지역의 발전을 촉진한다는 정책적 목표에서다. 지역문화, 지역인력 등 문화도시 사업에 붙은 이 ‘지역’이라는 꼬리표에도 <번역된 레시피>가 던진 질문은 유효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그렇게 애타게 부르짖는 ‘지역 문화’가 촉발되기 위해선, 지역을 덩어리진 경계가 아닌 개별적 주체들의 문화적 교차점으로 상상하는 말랑한 태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앞으로 점차 흐릿해져 갈 ‘지역으로서의 경계’를, 멋진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부평에서 꿈꿔본다.

(기획자: 백지윤, 시각예술가: 이희경)

양세훈

양세훈 (梁世熏, SeHoon Yang)

국문학을 전공하고 연극원에서 연극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글로써 사용성과 브랜딩 경험을 향상시키는 UX라이터로 근무 중이지만, 이 일이 일시적인 외도로 끝날지 새 정착지가 될지에 대해선 여전히 확신은 없다.

윤소정 (尹昭晶, SoJeong Yoon)

부천문화재단 문화도시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행정이 아닌 현장에서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바깥을 기웃거리고 있다. 하지만 찾고자 하는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선 여전히 확신은 없다.

답글 남기기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Pos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