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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대의 마지막

<제19회 인천여성영화제> 리뷰

차한비 (영화 저널리스트)

제19회 인천여성영화제 팜플렛 ©차한비

제19회 인천여성영화제 팜플렛 ©차한비

하늘이 온통 구름에 가려 햇빛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금세 비가 쏟아질 듯 덥고 습한 날씨가 마음에 걸렸는데 하필이면 그날은 일요일이기도 했다. 주안역으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 일찌감치 기대를 접었다. ‘오늘 같은 날 누가 영화를 보러 집 밖에 나오겠어.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 우중충한 창밖 위로 근래 관객을 찾아보기 어려운 극장 풍경까지 겹쳐 보였던 탓이다. 7월 16일 일요일, 개⋅폐막작을 포함하여 단편 23편, 장편 5편을 선보인 <제19회 인천여성영화제>가 지난 금요일부터 사흘간 부지런히 달려온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었다. 역에서 빠져나와 영화제가 열리는 다양성 예술영화관 ‘영화공간 주안’으로 걸어갔다. 은행과 병원이 위치한 대로를 쭉 따라가자 회색 상가 건물 하나가 등장했다. 외관만 놓고 보면 무심코 지나갈 만큼 평범하지만, 내부는 전혀 달랐다. 건물 7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듯했다. 한껏 조도를 낮춘 입구에는 푸른 빛이 감돌고, 방문객을 환영하듯 통로 군데군데 영화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로비에 다다른 후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괜한 걱정을 했구나 싶어서였다.

제19회 인천여성영화제가 열리는 영화공간 주안

제19회 인천여성영화제가 열리는 영화공간 주안 ©차한비

예상과 달리 극장엔 활기찬 분위기가 가득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이 여럿이었고, 상영작 중 절반 이상은 이미 티켓이 매진된 상태였다. 티켓 발권을 담당하는 활동가는 차근히 상황을 일러주며 미안해했지만, 그도 나도 아주 아쉽기만 하진 않았다. 그는 꽉 찬 객석을 보며 뿌듯할 테고 나 역시 오랜만에 듣는 매진 소식에 반가움이 앞섰다. 간신히 구한 티켓에는 ‘건강하게 다시 만나는 부적’이 그려 있었다. 영화제를 찾은 한 20대 여성은 어제 본 영화가 너무 좋아서 오늘은 엄마와 함께 왔다고 했다. “엄마가 먼저 (영화제에) 가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인천에서 40년 넘게 살았는데 여성영화제가 있는 줄은 모르셨대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극장 곳곳을 둘러보던 동행은 “우리 애랑 데이트도 하고 영화 보고 수다도 떨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거들었다. 저녁 무렵 그들 모녀의 뒤를 따라서 상영관에 입장했다. 활동가들이 관객에게 수건을 건넸다. 성소수자의 긍지를 담은 프라이드 플래그 문양이었다. 알록달록한 무지개 수건에는 올해 영화제 슬로건 ‘무너뜨리고 연결하기’가 적혀 있었다.

제19회 인천여성영화제 현장 모습

제19회 인천여성영화제 현장 모습 ©차한비

2005년 처음 개최하여 시민들이 서로 손을 보태고 마음을 쌓으며 걸어온 19년. 그간 인천여성영화제를 통해 수많은 작품이 관객과 만날 기회를 얻었다. <비밀은 없다>(2016) <보건교사 안은영>(2020) 등을 연출한 이경미 감독의 초기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2004)이 1회 영화제에서 소개됐고, 주연을 맡은 공효진 배우가 표현하듯 “시대를 조금 앞섰던 영화”이자 작년 재개봉해서 새로운 평가를 받은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부지영, 2009) 또한 일찍이 영화제를 다녀갔다. 스크린 속 여성의 얼굴들은 한 가지로 요약되지 않았다. 그들은 엄마이자 딸이었고 청소년이자 노인이었다. 카메라는 장애인을 비추는가 하면 비정규직 노동자를 쫓아가기도 했다. 물론 퀴어 역시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으며 작품에 등장했다. 여성은 존재를 뜻하므로 동시대 사회를 살아가는 누구에게든 영화 속 얼굴이 될 이유는 충분했다. 그 과정에서 인천여성영화제는 여전히 사회적 약자로 지목되는, 우리 곁에 분명히 존재함에도 가시화되지 않거나 심지어 외면당하는 이들에게 말을 걸고자 애썼다. 단지 그들이 세상과 맺은 연결고리가 약해서가 아니라,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 유효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다.

제19회 인천여성영화제 폐막 ©차한비

제19회 인천여성영화제 폐막 ©차한비

올해 개최를 앞두고 인천여성영화제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2020년부터 영화제는 인천시 보조금 사업을 기반으로 운영됐고 올해도 공모사업에 최종 선정됐다. 하지만 인천시는 난데없이 사업 승인을 미루며 상영작 목록 제출과 성소수자를 다룬 영화의 상영 배제를 요구했다. 프로그램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파행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명백한 인권 침해였다. 영화제는 기자회견과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시장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나, 인천시는 끝내 무응답으로 일관하며 보조금 지급을 무산시켰다. 영화제를 주관하는 인천여성회와 모씨네 사회적협동조합은 시의 지원 여부와 상관없이 영화제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했다. 흔들어 놓기로 작정한 상대 앞에서 영화제는 어떻게 그토록 흔들림 없이 제 목소리를 지켜낼 수 있었을까. 폐막식을 보면서 그 원동력을 조금이나마 짐작했다. 사회자는 무지개 수건을 자랑스레 펼치며 말했다. “자꾸 물어보시는데요, 이 수건은 반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잘 갖고 계시다가 인천퀴어문화축제에 들고 가세요!” 뒤이어 영화제 안팎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뛴 자원활동가들이 관객을 마주 보고 섰다. 그렇게 한 사람씩 호명하고 서로에게 박수를 건네는 사이, 마지막 영화를 상영할 시간이 다가왔다.

다큐멘터리 속 장면 ©반박지은

다큐멘터리 <두 사람> 속 장면 ©반박지은

폐막작으로 선정된 반박지은 감독의 다큐멘터리 <두 사람>은 70대 레즈비언 커플 김인선과 이수현을 담는다. 둘은 유학 중 처음 만났고 금세 사랑에 빠졌다. 결혼, 일자리, 종교 등 현실에 자리한 문제가 거대했지만, 독일에 정착하여 같이 살기로 결정했다. 노년에 접어든 어느 날, 나치에 박해받은 동성애자를 추모하는 기념비 앞에 나란히 서서 손잡고 사진을 찍었다. 감독은 그 사진 한 장에서 모든 것이 시작됐다고 회고한다. 사진 속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시간을 통과했는지 궁금했다고. 오랜 시간 서로 옆을 지키면서, 가족의 원망부터 세상의 비난까지 함께 겪어 내면서 둘은 애정과 돌봄의 공동체를 이뤘다. 다른 상영작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 또한 인물들의 얼굴을 다각도로 들여다본다. 김인선과 이수현은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노동자, 노인 등 여러 정체성을 지닌다. 그들은 불합리한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이고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려 노력하는 이웃이다. 동시에 노화와 질병을 경험하는 개인으로서 죽음의 무게를 실감하며 고민에 잠기기도 한다. 영화는 인물을 재촉하지도, 현실을 모른 척하지도 않는다. 한 발짝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로 한 선택은 두 사람을 향한 애정과 존중의 결과다. 덕분에 영화 속에는 불안이나 염려가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와중에도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농담을 주고받는 둘의 모습이 고스란히 저장된다.

다큐멘터리 속 장면 ©반박지은

다큐멘터리 <두 사람> 속 장면 ©반박지은

19라는 숫자를 햇수가 아닌 나이로 여기면 어떨까. 인천여성영화제는 올해로 열아홉, 십 대의 마지막을 지나고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막막함까지 고루 뒤섞인 나이다. 문턱 앞에서 이따금 고비를 마주하겠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한 번뿐인 열아홉을 축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객석을 가득 채워서였다. 어쩌면 <두 사람>은 그 마음에 전하는 영화제의 응답인지도 몰랐다. 더위를 무릅쓰고 갑갑한 하늘 아래로 나온 이들에게 고맙다고, 영화 속 연인처럼 우리도 “아픈 데 약 발라주고 등허리에 로션 발라주고” 하면서 오래오래 같이 살자고. 영화도 생일 풍경으로 막을 내린다. 자정이 넘은 시각, 파티는 끝났고 집안은 고요해진다. 문득 이수현과 김인선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는 듯, 혹은 끝나도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라는 듯 둘은 계속해서 마주 보고 껴안는다.

차한비 CHA HANBI

영화 저널리스트. 영화웹진 『REVERSE』 기자,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연구 저널 『ACT!』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화비평잡지 『독립영화』,
『필로』 등에 글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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