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인천작가회의를 이끄는 서번트 리더십
손병걸 시인을 만나다
류수연 (인하대학교 프론티어학부대학 교수)
시인이라는 운명을 마주하며
처음부터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 문예반 활동을 했었지만, 그저 청춘의 한 시절을 스쳐 간 찰나가 되리라 여겼다. 시를 쓰는 일이 그의 평생을 함께할 업이 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손병걸 시인에게 그것은 운명이 되었다.
이미 알려진 대로 그는 후천적으로 시각장애를 갖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변화된 삶에 적응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오히려 시간은 많아졌다. 삶 전체가 혼돈으로 가득해졌지만, 그래서 오히려 생각할 시간도 늘어났다. 그는 그 시간을 시를 쓰는 것으로 채웠다.
손병걸 시인 ©손병걸
처음부터 행복한 마음으로 시를 쓴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시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방식으로 다가왔다. 자기부정과 혐오에 대한 낙서가 그대로 시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그가 생을 붙잡는 힘이 되었다. 그리고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시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제적인 시작(詩作)은 PC통신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던 천리안문단에서 시작(始作)되었다고 말한다. 자칭 전파문학이라고 칭했던 천리안문단은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손 시인처럼 시를 쓰는 문청들도 제법 많았다고 한다. 시각을 잃고 어둠 속에 빠져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낸 것도 바로 이 PC통신 동아리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려움은 도처에 있었다. 손 시인은 후천적으로 시각장애를 얻었기 때문에 점자(點字)를 배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용 화면낭독 프로그램의 덕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문청이었던 그가 여러 편의 시집을 낸 중견 시인으로 성장하는 동안 이 프로그램도 점차 발전하였다. 처음에 띄어쓰기조차 제대로 표현해 주지 않았던 기계음이,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글을 읽어주는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최근에는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오디오북이 늘어나서 이전보다 접근성이 훨씬 높아졌다고 한다.
이처럼 시각을 잃었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갇혀 있기보다는 더 넓게 들리는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길을 함께 한 동반자는 바로 시(詩)였다. 그러니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손병걸 시인에게 시(詩)는 그대로 운명이었다고.
“저는 스스로를 반시각 패권주의자라고 말합니다.”
시인으로 살아온 20여 년, 손병걸 시인의 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첫 시집은 ‘징징거림’에 가까웠다고 고백한다. 자기 앞에 닥친 현실적인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에도 버거웠던 시절, 그는 시를 통해 고통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는 청각의 위대함에 제대로 눈을 뜨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시각과 청각의 차이를 섬세함이라고 말한다. 시각을 통해 얻는 이미지는 빠르게 정보를 얻게 하지만 때로 그만큼의 오류를 내포하기도 한다. 반면 청각으로 들리는 소리는 이미지보다 느리지만 보다 섬세하게 대상을 인식하도록 만든다. 보이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를, 때로 보지 않고 들음으로써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는 이러한 깨달음은, 그의 시를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반시각 패권주의자’라고 호명한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그가 꿈꾸는 시적 지향점은 어디에 있을까? 사실 오랫동안 그는 자신이 아닌 밖을, 그리고 타인을 시에 담아내는 것에는 어려움을 느꼈다고 말한다. 남의 이야기를 할 때는 너무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변화를 느끼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자신의 시가 ‘나’라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에 집중했다면, 이제야 조금씩 타인의 이야기로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은 의외의 기회였다고 한다. 한 토론회에서 발제로 나왔던 고영직 평론가가 ‘맛있는 악수’라는 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인의 시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말을 던졌다. 스스로도 몰랐던 변화를 짚어준 그 한마디가, 시인에겐 그 자신을 격려하는 말처럼 다가왔다고 한다.
「맛있는 악수」가 수록되어 있는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 ©걷는사람
이제 손 시인은 조금 더 스스로를 믿고 있는 듯하다. 시각의 오류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진실이, 청각적 심상을 통해 좀 더 가깝게 다가올 수 있음을 말이다. 그것은 낯익은 모든 것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오히려 잊혔던 진실의 울림이 될 수 있다. 그 찰나를 포착할 때, 그의 시는, 그리고 그의 소리들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개안(開眼)이 되리라.
“더 젊어진 인천작가회의, 실감하시나요?”
시인 손병걸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이제 인천작가회의의 대표인 손병걸 회장을 만나보자. 처음 인천작가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진행했던 과거 인터뷰에서, 그는 인천작가회의가 점점 더 젊어질 것임을 선언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언은 인천작가회의의 현재로 확인되고 있다.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떤지 질문을 던졌다.
그는 유쾌하게, 그 답을 스스로 실감하고 있다고 답하였다. 인천작가회의의 회장을 맡으면서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사람들을 불러내는 것이었다고 한다. 모든 단체가 늙는 이유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체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렇게 되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조직을 물리적으로도 젊어지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조직이 되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했고, 단체의 장으로서 그는 그 이야기들을 듣는데 집중해야 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젊은 작가들이 스스로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독려하였다.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어떤 일을 시작하면 인천작가회의가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형식을 취하고자 하였다.
변화는 구체적인 데이터로도 확인된다. 2020년 인천작가회의의 회원은 95명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는 약 110명 정도로 늘어났다. 어찌 보면 많은 수가 아니지만, 결코 적은 수도 아니다. 무엇보다 인천작가회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작가들의 수가 늘어났다. 30% 이하에 불과했던 회비납부율도 60% 이상으로 껑충 뛰었다고 한다.
“인천의 작가들이 주도하는 문화운동이 보다 적극적으로 지역사회와 연대할 수 있도록 든든하게 응원하려고 합니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바로 기관지인 『작가들』이 웹진으로 전환된 것이다. 사실 처음엔 내부에서조차 거부감이 컸다. 종이책에 익숙한 회원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된다, 안 된다’를 결정하기보다는 내부적으로 천천히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 구성원들의 의견을 반영하는데 집중했다. 젊은 작가들이 주도하면서 적극적인 설득의 과정이 있었고, 구성원들의 의견이 반영되면서 구체적인 방향이 정해졌다.
하지만 장벽은 또 있었다. 인천시로부터 지원을 받는 터라 종이책이나 일반적인 전자책이 아닌 웹진으로 전환되는 것에 대해 시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내부적인 설득과정에서 얻은 노하우는 인천시를 설득하는 과정에서도 좋은 바탕이 되었다. 여기엔 이재용 편집주간과 이병국 사무국장의 노고가 정말 컸다고 한다.
계간 작가들 홈페이지 이미지 ©인천작가회의 (홈페이지 바로가기)
웹진 『작가들』의 탄생과 함께 인천작가회의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현재 평론분과에서 진행하고 있는 ‘동네책방 북토크’라고 한다. 이것은 인천이라는 지역과 촘촘하게 연대해야 하는 인천작가회의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 사업의 시작은 무엇보다 하나의 질문이었다고 한다. ‘작가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인천작가회의의 평론분과는 이를 위해서 시민들을 찾아가려는 작가들의 노력이 더 필요함을 느꼈고, 그것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고 한다.
동네책방과의 연계는 그 출발점이었다. 젊은 작가들이 과정을 주도하면서 북토크 참여 작가에 대한 인건비뿐만 아니라 공간 대여 비용까지 제대로 지불할 수 있는 사업을 따냈다. 더 젊어진 인천작가회의의 가능성이 가시적 성과로 이어진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성원 사이의 그 어떤 ‘간극’도 서로에 대한 괴리로 느끼지 않는 인천작가회의를 만들고 싶습니다.”
어떤 조직이든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어떤 ‘간극’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이와 나이의 간극, 생각의 간극, 시대의 간극……. 손 시인은 적어도 인천작가회의 내에서는 이러한 간극이 작가들의 소통을 저해할 수 없도록,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어지는 곳이 되기를 바랐다고 말한다.
문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사실 문학은 자본의 논리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다. 문인이란 말 그대로 돈이 안 되는 영역에 자신의 삶을 던진 사람들이다. 손 시인은 인천작가회의야말로 이렇게 자기 욕망이 아닌 타자에 대한 연민 같은 것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곳이라고 자부한다. 그리고 그 진정성을 지켜내는 일이야말로 이 조직이 존재하는 근본 이유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제 인천작가회의의 대표로서 손 시인의 남은 임기는 6개월 남짓이다. 그의 다짐은 한결같았다. 모든 구성원들이 오랫동안 품어온 세상을 향한 마음 씀씀이를 잘 키워낼 수 있도록, 든든한 응원을 던지는 인천작가회의의 ‘듣는 귀’가 되겠다는 생각 말이다. 이러한 그가 남은 임기 동안에도 최선을 다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손병걸 시인 ©손병걸
양대 문인단체와 함께하는 한국근대문학관의 새로운 역사
마지막으로 본 인터뷰를 주관하는 인천문화재단에 남기고 싶은 말을 물었다. 손 시인은 인천문화재단과 문학단체의 관계가 훨씬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일례로 오는 11월로 다가온 한국근대문학관의 10주년 행사를 언급했다. 이 행사를 위해 한국근대문학관이 인천의 양대 문인단체인 인천작가회의와 인천문인협회에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손 시인은 이러한 연계가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기관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문인들에게 문화재단의 벽은 너무나 높게만 느껴진다. 어쩔 수 없는 ‘을’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재단과 예술가가 협력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협업이 더 늘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더 나아가 그는 다시금 당부한다. 인천문화재단이 그저 일을 하는 기관이 아닌 더 많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기관으로 거듭나기를 말이다.
오는 11월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지역의 예술가와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는 인천문화재단과 지역을 기반으로 창조적 활동을 이어 나가는 양대 문인단체의 아름다운 협업의 성과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한국근대문학관의, 새로운 협업과 상생의 10년을 여는 포문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