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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서사가 분열하는 공간

트라이보울 기획전시 <황해를 항해하는 자 – 12개의 통로>

김용진 (연수문화재단 문화콘텐츠 팀장)

대부분의 미술작품은 화이트큐브(white cube)라 불리는 입방체의 공간을 매개로 전개된다. 물론, 장소성(placeness)에 기반한 공공조형물이나 설치 작업도 있지만 미술작품 유통의 일반적인 유형이라 하긴 어렵다. 주류를 이루는 미술작업이 평면을 기반으로 생성되고 소비되기 때문인 이유도 있고, 설치의 용이성과 관람 접근에도 화이트큐브의 방식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다수의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화이트큐브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점도 상기 까닭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인천시가 2009년 인천세계도시축전 행사 개최를 추진하면서, 기념행사를 위한 모뉴먼트(monument)를 하나 축조했었는데, 그 건축물이 ‘트라이보울’(Tribowl)(인천 연수구 소재)이다. 트라이보울은 기본적으로 건축물의 일반적인 기능인 거주, 사무, 행사 등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외부에서 보면 조형적 요소가 두드러진 탓에 오브제에 가까운 거대한 덩어리로 다가온다. ‘하늘’, ‘땅’, ‘바다’를 상징적으로 수용한 건축물의 내력을 감안해 보면 더더욱 조각적 형질로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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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바람_돌이녹는다
2023, 털머위잎, 대나무, 낚시줄, 종이, 천, 와이어, 핀, 가변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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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보울 전시장 전경1

트라이보울 안으로 들어서면 내부 공간은 외형만큼이나 극적인데, 비대칭의 큰방과 작은방이 부양된 다리들로 연결되어 있고 무수히 노출된 철골 구조물들이 장기(臟器)처럼 얽혀 있어 콘크리트의 외피를 뒤집어쓴 유기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어떤 전시를 구성하든 녹록한 환경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차기율 작가가 큐레이터로서 인천 안에서 다채로운 결로 미술작업을 해 온 12명의 젊은 작가들을 ‘12개의 통로’라는 부제를 달아 트라이보울로 호출한 것은 다분히 의도된 기획으로 보인다.

전시 서문에서 확인한바, 인천 앞바다 황해(黃海)는 예상할 수 없는 격랑이 빈번한 곳으로, 비정형의 공간 속 트라이보울은 젊은 작가들의 불온한 현재를 수렴하는 가시적 형태이자 황해의 구체적 은유로 읽힌다. 관습, 습속, 사회적 체계, 몸, 관계, 금기, 하위문화, 심리적 균열, 소외, 타자, 경계 등 작가들 각자가 수용하는 매체의 유별함만큼이나 다루는 주제의 범주도 심상치 않다. 자기 작업의 본령을 세계를 이해하는 콘텍스트(context)로 가져가고자 하는 작가들의 의도가 반갑다.

자연물에서 얻은 재료를 사용해 원시의 종유석처럼 트라이보울의 인공적 구조물에 즉물적 현상을 설명하는 설치로 개입하는 최바람의 작업과 우리 의식 속에 부지불식 스며든 어떤 언어에 대한 심리적 고찰을 보여준 채준희의 영상 작업, 그리고 자기 정체성의 소여(所與)가 결핍되는 이유와 과정을 디지털 이미지로 차갑게 구성한 이재욱의 작업이 전시 공간의 초입에 놓인다. 집단의 전체적 의식 속에서 한 개인의 의식이 어떻게 지배당하게 되는지 애니메이션과 단속적인 슬라이드를 병치하고 작가 스스로가 실행한 작업의 행위를 실증의 근거로 함께 설치한 강상묵의 의도는 동굴과 같은 트라이보울 공간에 결착(結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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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웅_왼쪽부터 페스티벌 피스, 브랜뉴, 흔들리지 않는 꽐라
철판에 페인트

사회적 현상이 사람의 거주 조건과 자연 생태계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는지 그 관여의 프로세스를 관찰과 조사를 통해 채집된 이미지와 수집물들로 각각 시각화하는 설치와 아카이빙하는 김푸르나의 작업은 트라이보울의 비선형적인 동선을 따라 늘어서 있어 관람객들이 수집된 내용을 순차적으로 탐색하고 접근하도록 한다. 김푸르나의 작업 사이에 비스듬히 누운 경사면과 드러난 상부의 철골구조를 활용해 재단된 힙합 뮤지션의 군상을 부감하여 설치함으로써 장면화된 오브제에 리듬을 획득하게 만든 이지웅의 작업은 작가가 추구하는 음악적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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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_ANGELS 1~7 (연작)
2021, 털머위잎, 혼합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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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보울 전시장 전경2

앞서 열거한 작업을 벗어나려 할 때쯤 관람객은 기호와 토템적인 상징물로 가득한 이슬비의 설치에 다다른다. 부정적이지만 속박할 수 없는 욕망을 담지한 사회적 금기를 전리품처럼 둘러봐야 하는 까닭에 공간의 핍진성은 증폭된다. 한껏 증폭된 공간의 마지막엔 트라이보울의 예측하기 힘든 공간의 고저와 사방으로 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비석처럼 늘어선 평면작업들이 의외의 집중감을 선사한다. 의도되지 않게 다가온 시각적 경험을 간결하게 정제된 이미지의 형태로 남기는 윤수지의 작업과 사랑이라고 하는 강렬하고 복잡한 감정의 균열을 극단적으로 당겨진 작가 스스로의 자화상을 통해 섬세하게 기록하고자 하는 김다솔의 작업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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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묵_Stick out!
2022, 프로젝션 영상, 프로젝션 슬라이드, 오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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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푸르나_건설된 21가지의 존재들
2023, 종이에 드로잉 후 타일프린트, 혼합매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유리되어 떨어져 나온 인간의 소외를 무채색의 연필로 캔버스가 아닌 장지에 뭉개진 선과 어둠과 밝음의 극단적인 대비를 통해 부각하는 홍효정과 이성과 욕망이 뒤섞이는 자신의 감정을 무의식의 흐름과 본능의 발현에 맡긴 추상적 표현을 통해 들여다보고자 하는 이주연의 작업은 이성이 누르지 못하는 정념의 혼란스러운 경계면을 들춘다. 전시구성의 끝에서 만나는 김민조의 작업은 포착된 사물의 이미지가 표면적으로 제공하는 직관적 인상과는 달리 하나의 해석으로 포섭되지 않는 복잡한 정서를 기억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싶어 한다.

이제 얽혀 있는 전시 공간을 뒤로 하고 트라이보울의 밖으로 밀려 나가본다. 12명의 작가, 12명의 서사가 불균질의 공간과 만나면서 파열하는 현장은 역동적인 여운을 남긴다. 한 번 분열하기 시작한 공간은 쉬 가라앉지 않는다. 이제 미술 세계라는 자장(磁場)에서 자신과 자신 밖의 세계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통스러운 긴장을 이어가야 할 젊은 작가들에게 본 전시는 자신들의 작업이 어떻게 공간에서 소비되고 유통되는지 숙고해야 하는 숙제를 던진다. 미술작업은 시각적 메시지이며 나타난 메시지는 다시 쓰이는 텍스트와 읽히는 텍스트로 분열하기 때문이다.

김용진

김용진 (金容眞, Yong Jin Kim)

철학을 공부하다 미학이라는 우물에 빠져 지역 현장을 기반으로 하는 전시기획자를 꿈꾸게 되었다. 미술관의 어설픈 학예연구사로 머물뻔하다가 현재, 고향인 인천으로 다시 돌아와 지역 기초문화재단에서 삶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삶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실천 방법을 고민하고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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