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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인천의 무용을 지켜주세요
대한무용협회 인천지회장 김주성 무용가와의 만남
류수연 (인하대학교 프론티어학부대학 교수)
김주성
대한무용협회 인천광역시지회장
사단법인 한국실용예술협회 이사장
국립인천대학교 공연예술학부 겸임교수
이데아댄스컴퍼니 예술감독
몸으로 말하는 예술가
무용은 가장 대표적인 신체예술이다. 인간 신체 자체를 매체이자 콘텐츠로 하여 예술적 형상화를 추구하는 무용은, 인간 신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드라마틱한 움직임을 통해 관객을 매료시킨다. 그러므로 무용의 언어는 결국 우리의 몸짓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무용은 가장 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예술이기도 하다. 문학가가 언어를 조탁한다면, 무용가는 자신의 신체를 조탁한다. 무용가의 신체는 단순히 단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매체이자 콘텐츠로서 사소한 몸짓 하나에도 수많은 의미망을 담아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조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용의 언어(몸짓)는 언제나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서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오는 양가성을 지니기도 한다. 무용가의 몸짓은 언제나 인간 신체 밖으로 탈주하지만, 결국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내재하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무용가의 신체는 그 자체로 가장 찬란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사실 무대 밑에서 이러한 무용가를 만나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특히나 일상의 대부분을 책상 앞에서 보내는 필자에게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책이라는 매체에 갇혀 살고 있는 필자에게 무용이란 막연한 동경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일상의 가까운 곳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낯선 존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3년 전 박혜경 무용가를 만난 이후 오랜만에 마주하는 또 다른 무용가와의 만남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무용가 김주성을 만나다
김주성 무용가는 1975년 청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로 대학에 진학하면서 타향살이를 시작한 그가 인천에 뿌리내리게 된 것은 2001년이었다고 한다. 인천 출신인 아내와 만나 인천에서 신혼살림을 차리면서 그에게 인천은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지역 문화계와 소통하면서 무용가로서의 활동 역시 확장되었다.
그래서 그의 행적은 더욱 놀라웠다. 사실 필자가 김주성 무용가를 먼저 만난 것은 기사를 통해서였다. 대한무용협회 인천지회장인 그는, 이번에 3번째 연임으로 지역신문에서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인천 토박이가 아닌 청주에서 태어나 결혼 후에 인천으로 터전을 옮긴 이주민이었다니……. 그것은 인천이 얼마나 열려 있는 도시인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20여 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지역예술가들과 깊은 신뢰를 쌓은 김주성 무용가의 인품과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의 지난 임기는 코로나라는 가장 힘겨운 시기를 관통해 왔다. 코로나 기간이 모든 예술가에게 가장 혹독한 시기였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특히나 무대를 중심으로 한 공연예술 분야는 가장 큰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객과의 호흡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진 혹독한 빙하기를 거쳤기 때문이다. 그 때문일까? 지역예술가들과의 단단한 신뢰로 연이어 지지받은 대표자의 리더십에 대한 기대는 더 컸다. 그가 바로 김주성 무용가이다.
계획된 운명처럼 다가온 무용가의 길
김주성 무용가가 무용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로, 초등학교 시절에 무용을 시작하는 다른 무용가에 비하면 꽤 뒤늦은 편이었다고 한다. 본래 그는 운동선수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탁구선수로 활동하면서 도대표로 전국체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중학교 시절에는 킥복싱과 합기도를 배웠다. 무용이라는 낯선 길을 만나지 않았다면 무난하게 스포츠 분야로의 진로를 선택했으리라.
그런 그가 무용을 알게 된 것은 우연에 가까웠다. 킥복싱을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멋지게 다리 차기를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다리 찢기를 할 수 있는 유연성을 기르면 그것이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친구의 여동생이 유연하게 일자로 다리 찢기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무용을 배우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에 겁도 없이 덜컥 무용학원에 발을 딛게 되었다. 그 ‘누구나’에는 반드시 노력이 뒤따라야 함을 알게 된 것은 조금 더 뒤의 일이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무용에 매료된 것은 아니었다. 온통 여학생만 가득한 무용학원이 낯설기도 하고 그저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학생은 한두 달을 못 버티고 나간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오기로 버티는 기간이 끝나자 어느 순간 무용을 통해 몸으로 표현하는 일이 자신을 고양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운동선수로서 힘을 기르기 위해 신체를 단련했던 그의 목표는, 이제 몸짓으로 말하는 무용가가 되기 위해 신체를 조직하고 단련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거기엔 보다 강렬한 기억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영화 <백야(White Nights)(1985)>이었다.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발레리노 니콜라이는 공연을 위해 도쿄로 가던 도중 시베리아 상공에서 비상 착륙을 하게 되고, 그는 소련의 정보기관에 붙잡히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니콜라이가 다시 미국으로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여기서 니콜라이 역을 맡았던 실제 발레리노 미하일 바시리니코프(Mikhail Baryshnikov)야말로 그의 롤모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계획된 운명처럼, 김주성은 무용가의 길에 들어선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인천의 무용계를 지켜주세요.”
이 말은 협회장을 맡고 나서 현재까지 그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처음에는 “인천의 무용을 도와주세요.”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협회장의 일이란 대부분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쌓는 것이었다. 다른 예술 분야와 달리 무용은 많은 자본이 드는 공연예술이다. 무엇보다 무대와 관련된 제반의 것들이 자급자족되기 어려운 한계를 지니고 있다. 공연예술이라는 맥락 안에서도 다른 지점들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막연하게 도와달라는 것으로는 충분한 공감과 지지를 얻기 힘들었다.
그래서 강조하기 시작한 말이 무용계를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왜’와 ‘어떻게’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무용이라는 예술이 가진 특수성을 알림으로써 왜 무용이 다른 공연예술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지를 알리는 동시에, 그렇다면 무용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인지를 알리는 데 주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무용가가 오직 무대 위의 표현 그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실질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에 더해 무용계를 위해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점을 꼽아달라는 필자의 말에 그는, 여러 지원사업의 전제조건이 되는 정량평가에 대한 문제를 들었다. 현재 인천에는 예술인 지원과 예술창작 지원 등 많은 지원사업이 존재한다. 특히 인천문화재단이나 기초문화재단들이 들어서면서 창작자에 대한 지원도 늘고 방식도 다양해진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라고 한다. 문제는 대부분 이런 지원들이 정량적 평가에 치우쳐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다른 장르에 비해 외부 실적을 내기 어려운 순수예술(현대무용, 발레, 한국무용)에는 치명적인 한계로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정량적 평가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정성적 평가 부분에도 충분한 배려가 있어야만 인천 무용계의 고사를 막을 수 있음을, 그는 강조하였다. 순수무용이 가진 기초예술로서의 가치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무대의 아래에서, 무용가가 말하는 현실의 목소리
더 나아가 그는 여러 지원기관과 협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재고해 줄 것을 강조하였다. 인천 내에서 여러 지원사업이 활성화되면서, 인천을 기반으로 한 예술단체들은 오히려 왜소해져 버린 상황을 지적하였다. 예술지원사업이 개별 예술가에 대한 지원으로 집중되면서, 협회나 단체에 소속되는 것이 점차 무의미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지원사업에 지원하기에 유리한 청년 예술가들은 협회 쪽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수년만 지나면 대부분의 예술가협회가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는 현실적인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한다.
이것은 결국 지역을 연고로 하는 예술가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다. 현재 인천의 상황이 그러하다. 인천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예술가는 있어도 지역과 함께 소통하면서 안무, 연출, 기획 등의 구체적인 활동을 하는 예술가는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따라서 그는 조심스럽게 지원사업의 한계성에 대해서도 입을 떼었다. 대부분의 지원사업이 지속성을 보장받지 못하다 보니 미래지향적인 사업을 구상함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연구와 마찬가지로 예술지원에서도 일정한 평가 과정을 부여하면서 지속사업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필요가 있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예술지원이 지나치게 예술단체 중심으로 기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단체들의 순기능(지속성, 발전 가능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업)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한 현재의 현실 역시 바람직하다 할 수 없으리라. 결국 모든 조직을 굴러가게 만드는 것은 사람과 지원금이다. 예술단체도 예외일 수 없다. 즉, 사업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예술지원을 이끄는 여러 기관이 예술단체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 부분에 대해서도 고려해 주길 바라는 이유이다.
“인천문화통신 3.0에 무용에 대한 리뷰도 좀 더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모든 예술 분야가 그러하듯이 무용 역시 관객에 목말라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전문적인 리뷰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는 인천문화재단의 기관지인 「인천문화통신 3.0」에서 이러한 역할을 해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한다.
「인천문화통신 3.0」이 무용에 대한 리뷰도 다루고 있지만, 사실 일반 미디어에서는 다른 분야에 비해 다소 적은 편이다. 더구나 무용은 공연예술의 영역 안에 들어가 있는데, 다른 장르에 비해 많은 조명을 받지 못할뿐더러 전문적인 리뷰를 얻기도 쉽지 않다. 이 관심과 주목을 「인천문화통신 3.0」이 해줄 수 있다면 인천 무용계의 발전에 좋은 발판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무대를 기록한다는 것은 무용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었던 경험이었던 같습니다. 그것이 멈추지 않고 지속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주성 무용가는 지난 코로나로 인해 얻었던 가장 큰 변화는, 현장 무대를 대신하거나 보완해서 무대를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기록하는 작업을 했던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이러니하게 코로나로 인해 무용이라는 현장 예술을 영상, 즉 미디어와 결합해서 기존과는 좀 다른 형태로 무대에 구현하거나 NFT라는 가상공간과의 연계점을 인지하고 시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가로서 그의 사고 폭을 넓힐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변화들이 한시적인 것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무대를 만들 수 있는 새로운 방법과 가치가 코로나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것은 무용이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이 무용에 대한 지원의 파이를 단순히 나누는 것이 아닌 확장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파이가 고정된 상태에서 지원 규모를 쪼개기만 한다면 예술가들의 생존은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인터뷰를 마치며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김주성 무용가가 화두로 던진 여러 고민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문화재단의 역할이 더욱 소중한 것이리라. 예술가들을 직접 지원하는 인천문화재단의 참신한 아이디어와 적극적인 실행력을 기대해 본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