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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읽기’가 벌이는 ‘싸움’

문종필의 『싸움』을 읽고

진기환 (문학평론가)

문종필의 글은 형식적으로 매우 독특하다. 그의 글에는 어려운 철학적 개념이나 이론이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다른 작품들과의 비교분석을 통해 자신이 다루고 있는 작품을 쉽사리 위치 짓거나 평가하지도 않는다. 그의 글을 천천히 읽다 보면, 그는 많은 비평가들이 작품을 읽으며 느끼는 철학적 보편화와 문학사적 계보 구성이라는 강렬한 유혹에 좀처럼 빠지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글에서 철학과 문학사적 맥락을 대신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비평가 자신의 삶과 경험이다. 문종필은 ‘나’라는 주어를 통해 자신의 삶과 경험을 준거 삼아 작품을 읽는 매우 솔직한 방식의 읽기를 수행하는데, 문종필의 글이 형식적으로 독특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문종필 특유의 ‘솔직한 읽기’는 에세이적 형식을 띄고 있는 1부는 물론이거니와 본격 비평의 형식을 띈 다른 글에서도 도드라진다. 가령 박일환의 시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글(「사적인 이야기-부축의 시론에 대한 몽상」)에서는 박일환과의 만남이라는 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글을 전개하고, 오석균의 시집 『기린을 만나는 법』에 대한 글(「어떻게 불어도 그대 곁으로 흐르는 바람」)에서는 자신이 심은 상추에 꽃이 폈다는 이야기로 글을 연다. 이렇게 글의 서두를 자신의 경험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슬며시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기도 한다.

싸움

그렇다면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인 서술을 위해 ‘나’를 기술해보자. 인천시 동구 송림1동 257번지에서 태어나 송현동 주변에서 살아온 ‘나’는 과연 지역에서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인가. 2017년 문학평론가로 2021년에는 만화평론가로 등단한 이후, 6년 동안 쉬지 않고 꾸준히 기록해온 나의 흔적이 지역성을 보여줬을까. 내가 청탁받았던 순간들을 생각해 본다. (중략) 내가 쓴 20권 정도의 시집 해설 대부분이 지역의 표정들이었다. 강원도, 부산, 대구, 전라도, 대전, 경상도 등 다양했다. 이런 나의 이력은 무의식적으로 여러 지역 문학을 고르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지역 문학이 담론화 되고 있는 시대에 골골했다는 나의 고백이 단숨에 철회되는 순간이다.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한 작업은 없다.

-「구호(口號」), 519쪽

이러한 고백은 글을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만들고 객관적인 분석을 막을 우려가 있다. 그러나 문종필은 이런 고백들을 통해 차근차근 작품으로 전진해나가며, 자신의 경험을 준거삼아 작품을 읽어나간다. 자신의 삶과 경험을 통해 끝내 도달하는 지점이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의 고백은 주관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객관적 분석’을 가능케 하는 지렛대다.

이러한 읽기가 효과적으로 구현되었을 때, 읽는 사람은 몰입감과 재미를 느낀다. 비평가의 글을 읽는 느낌이 아니라, 인간 문종필이 옆에서 작품을 설명해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솔직한 읽기’가 반드시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을 읽어내는 준거인 문종필의 경험이 다소 추상적이거나 혹은 작품과 다소 동떨어진 맥락으로 제시되었을 때는 글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세 가지 색」은 그러한 약점이 도드라진 글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정우신, 이소호, 박준의 시집을 차례대로 읽는 글인데, 박준을 분석하는 부분에서 문제가 부각된다. 이 글 또한 문종필 본인의 경험을 통해 박준 시에 대한 자신만의 분석을 제시하는데, 세미나 동료들이 박준 시인의 시를 질투했다는 경험과 “인지도와 명성이 있는 시인들”이 “대형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지 말고 힘없는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결론이 잘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글의 의도는 파악이 가능하나, 전체적으로는 비평가의 감정과 흥분이 분석을 추월한 느낌이다. 이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글은 감정과 흥분보다는 침착한 경험으로 작품을 읽어내는데 몇몇 글들, 특히나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싸움’에 대해 말할 때는 구체적 경험보다는 이상理想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엿보인다.

‘싸움’은 문종필의 데뷔작인 「멈출 수 없는 싸움」부터 시작된 문종필 비평의 주된 테마다. 그런데 문종필에게 ‘싸움’이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짚어내기는 다소 어렵다. 부조리한 세상과의 싸움이라는 측면으로 읽히는 대목이 있는가 하면, 불공정한 문단과의 투쟁으로 읽히는 대목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느 글에서는 속물적인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읽히기도 하며, 또 어떤 글에서는 작가적 태도에 대한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물론 하나의 테마가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 사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그 의미는 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비평가 자신이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는 테마라면, 그것을 자신의 손에 쥐고 명확한 개념으로 구체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그것이 평론집의 제목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아쉬움과는 별개로 그가 벌일 앞으로의 ‘싸움’을 응원하고 싶다. 구체적인 양상이 어떻게 되었건 간에 문종필의 ‘싸움’이 세상을 보다 올바른 방식으로 바꾸고자 하는 행위라는 건 명약관화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보다 올바른 세상에 살고 싶다는 욕망은 우리 모두의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가 “누구도 승산 없는 싸움을 시작하진 않는다.”라고 말한 것을, 자신의 ‘싸움’으로 증명해주길 바란다.

진기환

진기환 陳起煥 Jin Gi Hwan
202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활동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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