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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현장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한국 근대추리소설 특별전 – 한국의 탐정들>
박보연 (성균관대학교)
“탐정의 혈관에는 강철이 돌아야 합니다.”
여기 프록코트와 실크해트 차림에 모노클을 낀 한 남자가 있다.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채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풀어낸 명탐정이다. 이 사람의 이름은 셜록 홈즈도, 에르큘 포와로도 아니다. 그의 이름은 유불란(劉不亂), 죽일 유(劉)자를 성씨로 가진 사람답게 심상찮은 살인사건들을 해결해내는 한국 근대의 명탐정이다. 셜록 홈즈와 괴도 뤼팽이 탄생하고 인기를 끌던 시절, 놀랍게도 한국에서도 명탐정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한국근대문학관에서 한국의 근대추리소설을 주제로 한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다. <한국근대추리소설 특별전 – 한국의 탐정들>(2021.11.5.~2022년 상반기)이다. 이 전시는 현대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탐정들을 중심으로 한국 추리소설의 역사를 조망한다.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각 작품의 살인사건에 몰입해 범인의 정체를 골몰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의 탐정들 포스터 (인천문화재단 제공)
전시는 총 6개의 섹션과 하나의 특별 코너로 나뉘어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며 마주하게 되는 첫 번째 섹션 ‘정탐의 출현’에서는 한국 탐정소설의 시작을 보여준다. 한국 최초의 탐정소설은 이해조의 『쌍옥적』(1908)이다. 이 시기 한국에 처음 등장한 추리소설과 탐정은 ‘정탐소설’과 ‘정탐’이라는 이름을 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미궁에 빠진 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썼을 법한 시체 초검 보고서와 법의학서, 범인의 행로를 기록한 지도를 보고 있자면 CSI 못지않은 한국 근대 시기 탐정들의 활약상이 눈앞에 그려진다.
두 번째 섹션은 ‘소년탐정’이다. <명탐정 코난>이나 <소년탐정 김전일> 덕분인지 소년탐정이라는 단어는 우리들에게도 익숙하다. 1920년대 중반에 소년탐정이 한국 근대추리소설의 역사에 등장한다. 이 시기는 방정환을 중심으로 ‘어린이’라는 말이 만들어지면서 근대적 어린이관이 형성되던 시점이다. 전시장에는 방정환이 어린이들을 위해 창작한 『동생을 찾으러』(1925)가 도트 게임으로 구현되어있다. 게임 속에서 직접 소년탐정이 되어 납치당한 동생을 구하러 떠나보자.
사진 1. 『마인』 신문 연재 삽화 모음
사진 2. 『국보와 괴적』 컨셉 아트
ⓒRUBY RECORDS
기획전시실의 2층으로 올라가면 세 번째 섹션 ‘탐정의 탄생, 프로탐정의 출현’을 만날 수 있다. 1920년대가 되면 한국의 독자들이 셜록 홈즈와 아르센 뤼팽과 같은 외국 추리소설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국의 창작 추리소설 속에서도 민간 탐정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전시장에서는 민간 탐정이 최초로 등장하는 소설 『혈가사』(1920)를 애니메이션으로 감상할 수 있다.
마침내 네 번째 섹션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명탐정-유불란(劉不亂)’이 등장한다. 이 섹션에서는 모리스 르블랑을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진 유불란이 다양한 살인사건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추리소설에서 탐정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팜 파탈로 등장하는 여성들이다. 한국형 추리소설에서 이 팜 파탈들은 탐정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자신의 목표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마인』(1939)에서 유불란은 팜 파탈로 인해 진범을 놓치게 된다. 이에 그는 “탐정의 혈관에는 강철이 돌아야”한다는 말과 함께 탐정을 폐업한다. 유불란이 놓친 진범이 누구였는지는 전시장에서 직접 추리해볼 수 있다.
다섯 번째 섹션인 ‘변질된 탐정들’에서는 『태풍』(1942)이라는 작품으로 돌아온 유불란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유불란이 아니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전쟁이 이어지던 상황 속에서 유불란을 비롯한 탐정들은 일본의 전쟁 승리를 위해 스파이를 색출하는 방첩활동을 벌인다. 이처럼 변질된 탐정의 모습은 해방 이후 새로운 탐정의 등장을 통해 해소된다. 여섯 번째 섹션 ‘해방기 탐정, 애국 탐정 – 장비호’에서는 유불란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탐정 장비호를 만나볼 수 있다. 그는 예술과 격투기에 능한 잘생긴 로맨티스트이며 경찰들도 풀지 못한 사건들을 척척 해결해내는 명탐정이다. 도난당한 신라 금관을 찾기 위해 일본과 중국을 종횡무진 하는(『국보와 괴적』(1948)) 장비호의 행보를 전시를 통해 따라가 보는 건 어떨까.
사진 3. 주요 인물들의 컨셉 아트를 모아둔 조형물
<한국의 탐정들>은 최초의 한국근대추리소설 전시로서 희귀한 자료들을 공개하고 있어 학술적으로 의미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 관람객의 입장에서도 흥미진진한 전시다. 관람객은 작품 속 장면을 구현해놓은 포토존, 피 묻은 증거품들, 직접 해독해볼 수 있는 암호를 통해 소설을 오감으로 체험해볼 수 있다. 전시를 따라가다가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진다면 특별 코너로 향하면 된다. 20세기 초 번역, 번안 추리소설들을 소개하고 있는 특별 코너에는 다양한 추리소설들이 함께 비치되어 있어 원하는 작품을 직접 읽어볼 수도 있다.
셜록 홈즈는 알지만 유불란은 모른다면, 혹은 그냥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한국의 탐정들>을 관람하러 가보자. 전시는 무료이고 방문이 어려우면 홈페이지에서 VR로도 관람이 가능하다. 하지만 넉넉히 시간을 잡고 직접 찾아가서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온라인으로는 체험하기 어려운 다양한 장치를 통해 미스터리한 사건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작품도 읽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만다. 그럼 범인들의 실마리를 찾으러 지금 떠나보자.
박보연 (朴保姸, Park, Bo Yeon)
: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오래된 시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