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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마당예술동아리 ‘마냥’의 무대
눈앞이 깜깜해지는 순간, 공감 속에 희망을 꿈꾸다
박수희
12월을 코앞에 두고 닥친 갑작스러운 한파로 느닷없이 겨울이 시작됐다. 매번 겨울마다 시베리아보다도 춥다는 한파를 온몸으로 겪었으면서도 그 추위를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계절의 변화가 낯설다. 자고 일어나니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처럼 세상은 바뀌어 있고, 두꺼운 외투를 껴입으며 처음 겨울을 맞은 사람처럼 어제와는 달라진 오늘을 맞는다.
인천 미추홀구 인하대 후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학산문화원 4층에는 지역주민과 늘 가까이 있는 학산소극장이 있다. 아담한 무대와 계단식의 객석 114개를 갖춘 작은 규모의 소극장이지만, 시민에게 활짝 열린 생활문화 공간으로 다채로운 공연이 풍성하게 열리는 곳이다. 이른 추위가 이어지던 12월 2일 금요일 오후, 시각장애인 마당예술동아리 ‘마냥’이 학산소극장에서 제2회 정기공연을 올렸다. 오후 햇살이 가득한 로비는 연극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어두운 무대와 객석은 마지막 점검을 하는 스탭들의 손길로 분주했다. 일찍부터 모여 무대 리허설을 마친 ‘마냥’ 회원들은 깜깜한 무대 뒤 대기실에서 긴장과 설렘으로 무대에 오를 시간을 기다렸다.
‘마냥’은 2017년 미추홀학산문화원과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이 함께 만든 마당예술동아리다. 오지나 연출과 동아리 회원들은 창단 때부터 6년 동안 해마다 시각장애인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창작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올해부터는 기초반과 심화반을 나누어 운영하면서 연극 활동의 확장을 모색하고 있다.
기초반에서 준비한 작품은 15분 길이의 유쾌한 연극 <시각장애인 생활백서>로, 초보 시각장애인 한국 씨가 베테랑 선배들에게 배우는 슬기로운 시각장애인 일상의 노하우를 유쾌하게 풀어냈다. 시각장애는 선천적인 경우보다 후천적인 경우가 더 많다. 최근에 시력을 잃고 시각장애인이 된 김한국 씨가 한국 씨 역할을 맡았다. 심화반은 40분 길이의 코믹극 <희망, 5mm>를 준비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넘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싶어 인하대 연극영화과 학생들을 객원 단원으로 모집해 함께 연극을 만들었다. 시각장애인 무료 해외여행 이벤트 설명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소극장의 문이 열리자 로비에서 티켓을 받은 사람들이 어두운 극장 안으로 입장했다. 하얀 지팡이를 짚은 사람들이 반보 앞서서 걷는 안내자의 팔꿈치를 가볍게 잡고 계단을 올라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하얀 지팡이는 시각장애인들의 이동을 돕는 도구이자 자립과 성취의 상징이다. 객석을 채운 관객 중 절반은 시각장애인이고 절반은 비장애인이다. 지팡이와 안내자에 의지해 좌석을 찾는 관객의 속도는 느리고 침착한 ‘아다지오’. 빠름에 익숙한 요즘 시대의 속도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이 시간만큼은 학산소극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아다지오의 빠르기로 호흡하고 있었다.
기초반의 <시각장애인 생활백서>로 정기공연의 첫 무대를 열었다.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배우들은 주로 무대 가운데 놓인 의자 위에 앉아 연기하거나 서로에게 의지해 무대 위에서 침착하게 동선을 움직였다. 코믹한 설정과 기발하고 섬세한 연출로 시각장애인들이 느끼는 일상의 불편과 사회적 편견에 대한 풍자를 콩트로 엮어냈다. 무대 한쪽에서 연주하는 라이브 기타 반주에 맞추어 배우들은 익숙한 멜로디의 옛 노래를 불렀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대사와 경쾌한 음악으로 전달된 메시지에 관객들은 함께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
시각장애인 생활백서
(사진 제공: 박수희)
심화반의 공연에 앞서 미추홀구 성우동아리 ‘미추홀목소리’가 제작한 오디오북 <미추홀, 바다를 담다>의 짧은 영상 상영회와 음악생활자 듀오 <기타등등>의 축하 공연이 이어졌다.
<희망, 5mm> 연극은 나래이션의 음성 “제1막“으로 시작됐다. 라디오 드라마처럼 연극 중간중간 상황 설정이나 무대를 설명하는 나래이션이 이어졌다. 무대 앞쪽에 앉아 나래이션을 하는 배우는 저시력의 시각장애인이다. 아주 크게 확대한 글씨를 낮은 온도의 말로 또박또박 읽어 전달해 주었다. 시각장애인은 앞을 전혀 보지 못할 거로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보지 못하는 ‘전맹’보다 빛을 인지하고 사물의 윤곽을 알아볼 수 있는 ‘저시력’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관객들의 모습
음악생활자 듀오 기타등등 축하공연
연극희망, 5mm
(사진 출처: 박수희)
시각장애인 배우 3명은 무료여행 이벤트에 참여한 시각장애인 역을 맡고, 비장애인 객원단원 4명은 사기극을 벌이는 여행사 직원과 삐끼역을 맡았다. 객원 단원들은 시각장애인 배우들이 앉아 연기하는 의자 주변으로 뛰어다니고 때론 춤도 추면서 무대 공간을 채웠다. 특히 여행사 직원들이 이벤트에 참여한 시각장애인들을 바퀴 달린 의자에 태우고 빠르게 무대 위를 질주한 ‘비행기 시뮬레이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의자 바퀴의 요란한 소리와 왁자지껄한 즐거움의 탄성들이 무대에서 쏟아져 내렸다.
연극이 고조되면서 시력이 5mm밖에 남지 않은 시각장애인 오미리와 학자금 대출, 밀린 월세로 앞이 막막한 취준생 박수정은 누가 더 ‘눈앞이 깜깜’한지 서로 울분을 토한다. 누구나 눈앞이 깜깜해지는 좌절의 순간을 겪는다. 그때 필요한 것은 손을 내밀어 일으켜 줄 누군가이다. 함께 손을 잡고 위기에서 빠져나온 미리와 수정은 서로의 ‘깜깜함’을 이해하며 아픔과 기쁨을 나누는 친구가 된다.
커튼 콜 사진
커튼 콜 사진
단체 사진
(사진 제공: 박수희)
지난여름 단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로 대본을 쓰고, 연극으로 엮어 무대를 준비한 오지나 연출은 ”서로가 희망이라는 손을 내미는 시간이 됐기를 바랍니다.”라며 무대 인사를 마쳤다.
서로 다른 말과 몸들로 각자의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고 공감하기 위해 우리는 무대에 오르고 연극을 관람한다. 다른 감각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마당예술동아리 ‘마냥’은 땀 냄새 가득한 무대에서 희망을 이야기했고, 내 마음은 한결 따뜻해졌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객석이 환해지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갑자기 익숙하던 것이 낯설고, 낯선 것이 익숙해 보인다.
박수희 (SuHi Park, 朴秀姬)
건축을 전공했고 지금은 문화대학원에서 지역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다채롭고 평범한 사람들의 공간과 일상을 시속 4km의 속도로 걷고, 보고, 말하고, 읽고, 쓰고, 노래한다. 특히 오랜 시간과 성실한 손길이 담긴 것들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