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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층적 기억으로 다시 새긴 지역의 좌표
2022 APY 입주 작가 기획전
《Remapping Remapping Remapping: Time, Space, Memory 》
2022.10.22.sat-11.27.sun
공지선 (시각예술작가)
바닥에 내려앉은 낙엽들이 제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스러진다. 가지 끝에 매달려 노랑과 빨강의 농후한 빛깔을 내던 게 바로 어제 같은데 눈을 끔벅일 때마다 하나둘 떨어지더니 이내 회색 바닥을 형형색색으로 빼곡히 채웠다. 거리에는 ‘벌써’를 이야기하는 개탄 섞인 목소리듯이 들려온다. 시간은 멈추는 법이 없다. 곧 이 계절도 차가운 바람에 휩쓸려 사라질 것이다. 연수문화재단 예술 창작공간 아트 플러그 연수에서 진행된 <APY 1기 입주 작가 기획전 – Remapping Remapping Remapping : Time, Space, Memory>는 지역의 지나온 계절과 이야기들을 현재로 끌어온다. 사람에게 생이 있듯 이 땅에도 세월이 있다. Save-a-블라블라(갈유라, 기슬기, 한수지), 이성경, 정정호 이 다섯 명의 작가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채집한 연수의 층위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사유될까.
발끝 뒤로 사라지는 계절의 끝자락에서 아트 플러그 연수는 수많은 이야기를 머금은 듯 조용했다. 굽이치는 골목을 타고 올라가니 벌써 누런빛으로 가라앉은 잔디 들이 계절을 대변하는 듯했고 풍경을 비추는 창들은 시간을 비춰냈다. 입구를 지나 전시장에 들어서자니 서로의 몸을 기대고 있는 것처럼 가까이 열린 문 세 개가 눈에 들어왔다.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빛 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첫 번째 방의 주인인 이성경 작가의 작품은 사방이 막힌 공간 안에 새로운 창을 뚫어내었다. 화면 위에 차분하게 내려앉은 흔적은 목탄을 사용하는 작가의 표현 방식과 맞물려 공간의 시간을 직접적으로 다가오게 한다. 소음이 없는 화면에 새겨진 장면 들은 누군가가 생동했던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그려내어 먼발치에서 메아리치는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가 그려낸 풍경의 경험이 아스라이 다가온다. 목탄의 입자를 장지에 흩뿌리고 지우개로 지워가며 생기는 수많은 레이어는 누적된 시간만큼이나 고요히 침묵하고 있는 과거 연수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며 ‘흔들림’의 움직임을 은유한다. 과거 수많은 삶이 생동했던 청학풀장의 모습을 담은 <소리 없는 풍경 22-3>에서는 현재 사람이 없고 침묵만이 남은 공간을 차분히 그려내었다. 다양한 조각으로 기록된 수영장의 모습은 원동력이었던 ‘물’이 사라진 모습이지만 그 흔적이 깊이 새겨져 마치 여전히 그 자리에 모든 것이 존재하는 듯하다. 세월에 소실된 수영장 벽면의 글자는 있는 그대로 현재를 보여주며 마치 수많은 시간이 동시에 기록된 느낌을 준다. <또 다른 그림자 22-2>와 <또 다른 그림자 22-3>은 도시의 현재를 어긋난 시선으로 기록한다. ‘그림자’를 매개로 작업을 이어오던 작가가 유리에 비친 ‘색 그림자’를 다루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은 건물 일부를 조각내어 실체 하는 장면과 건물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의 유리 벽면에 비춰낸 풍경은 시간은 같지만, 무언가의 ‘흔적’이라는 데에서 또 다른 시선을 경험하게 한다. 공간에 들어서 이성경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작가의 시선이 자신의 시선에 포개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소리 없는 풍경 22-3-1~5 이성경, 장지에
채색, 목탄, 91x73cm,2022
또다른 그림자22-2 이성경, 장지에
채색, 목탄, 140x98cm,2022
이성경 작가 전시 전경
(사진 제공: 공지선)
두 번째 방에 들어서니 정정호 작가의 이미지 들이 공간을 공허하게 울리고 있었다. 정정호 작가는 주로 지역의 변화나 그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 들을 사진과 영상을 이용해 시각화한다. 지역민과의 관계는 그의 작업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프레임에 담긴 이미지만 보아도 그들의 삶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아라베스크>는 이슬람교 문화권에서 사원의 벽면이나 공예품을 꾸며내는 무늬 양식인데 삶이 빠져나가고 공허해진 지역에 비워진 중고차들이 빼곡히 들어서고, 그 내부에 새로이 생을 꾸려나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을 기록한다. 지역에서 발화하는 이야기는 독자적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새로운 현상을 야기하며 끊임없이 이어진다. 얽히고설킨 현상 들은 서로의 삶을 견고히 뒷받침하여 또 다른 이야기를 자아내 내는데 정정호 작가는 가장 가까운 내부로 침투하여 지역에서 발화하는 관계 들을 가감 없이 기록한다. 외부의 폭력적인 시선 내부에는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삶을 이어 나간다. 그리고 그를 기록해 내는 작가와 현장감과 거리감은 프레임의 흔들림과 철창 밖 시선으로 기록되어 존재하는 간극을 나타낸다. 벽에 붙은 작은 사진들과 놓인 의자 앞에 쉴 새 없이 시간을 바꿔내는 화면상 이미지 들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 공간에 방문한 관객 둘에게 질문을 던진다.
정정호 작가 작품
아라베스크
정정호 작가 작품
아라베스크
정정호 작가 전시 전경
(사진 제공: 공지선)
Save-a-블라블라(갈유라, 기슬기, 한수지)의 공간은 조금은 특별했다. 분명히 실내일 터인데 어두운 커튼을 치고 들어선 공간은 마치 바람이 부는 외부에 선 듯한 착각을 자아냈다. 멀리서 빛나는 빛들이 강나루의 끝자락에서 선 별빛처럼 보였는데 관조 대에 올라서 망원경을 눈에 댄 순간 그것들은 멀리서 타오르는 별이 아닌 누군가의 시선으로 새로이 직조한 시간임을 알게 한다. 세 명의 작가들이 지역을 리서치하면서 만들어 낸 이미지는 멈춰있는 듯싶었으나 차분히 움직여 마치 ‘살아있는’ 것을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탐조와 함께 하나하나 반사되는 이야기 들을 보고 있노라면 등 뒤로 세 명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이는 세 명의 작가들이 지역 리서치 투어로 인해 동일한 공간을 각자의 시각으로 담는 과정을 기록한 <두 시선의 사랑 법>이다. 레지던스 입주 후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 프로그램은 총 3회차로 진행되어 지역을 새로이 해석하고 담아내는 Save-a-블라블라 팀의 과정을 들을 수 있다. 정해진 코스에서 시작되어 끊임없이 확장해 가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풀어 낸 지역 들은 놀랍게도 다른 층위를 비추며 흩어져 있는 연수의 지역을 한곳으로 함축한다. 필요에 의한 프로그램이었으나 그 내부를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에서 세 명의 작가 들의 애정이 어린 시선을 바라볼 수 있다.
save-a-블라블라(갈유라, 기슬기, 한수지)
작품 전경 사진
두 시선의 사랑법 save-a-블라블라(갈유라, 기슬기, 한수지),
가변재료(미디어, 사운드, 가변설치), 2022 작품 전경 사진
(사진 제공: 공지선)
한 지역에 작가들이 상주하고 작업을 지속한다는 것은 일회적 대상으로서가 아닌 배경 자체가 옮겨질 수 있는 귀중한 경험임에 틀림없다. 단순히 함몰되는 결과물이 아닌 작가들이 바라보는 눈으로, 그들이 가진 독자적인 목소리로 새로이 전복시킨 지역의 이야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경험을 야기한다.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지역은 분명히 우리의 삶과 포개어 함께 나아간다. 그 지점에서 찍어내는 좌표 들은 고정적인 것이 아닌, 시간과 함께 생동하는 시선일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계절 들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공지선 (孔知善, Gong jiseon)
회화를 비롯해 다양한 소재와 두구들을 활용한다. 굳어진 숭고함에서 벗어나 사회의 도구로 소모되고 소멸하는 동시대 사람 들의 저항을 표정에 담거나 도구로 만들어 표현하고 있다.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예술 기획을 하고 있으며 출판과 다큐멘터리 등 그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