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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시작, 그리고 또 다른 시작점에서
시각예술가 정용일과의 만남
류수연 (인하대학교 프론티어학부대학 교수)
정용일 작가는 1956년 인천에서 태어나 송도고등학교, 중앙대 동 대학원, 파리1대학교 조형예술학과에서 전공심화학위D.E.A를 졸업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개인전은 서소문 성지역사박물관, 금호미술관, 예술의전당 등 30회, 단체전은 80년대형상미술전. 금호미술관, 21C한국미술의 주역전, 성곡미술관, 2012 인천아트플렛폼 입주작가전 등 300여회를 가졌고 2022년 인천문화재단에서 수여하는 ‘우현 예술상’을 수상하였다.
예술가를 만나는 일은 늘 설렌다. 그것은 한 사람을 넘어 한 세계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용일 화백과의 만남 역시 그러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에 짧은 동영상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미리 접할 수 있었다. 지난 2021년 서소문 성지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된 초대기획전에 대한 영상이 그것이었다.
2021년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된 그의 초대 기획전 <삶의 경계 – 生>(2021. 3. 4. ~ 3. 28)에 대한 동영상은 그의 작품 세계를 설화나 무속과 같은 초월적 세계와 우리 민족의 공동체적 삶의 현장을 담아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조금 다른 지점이었다. 그가 그려내는 처용이나 바리데기와 같은 무속의 인물들이 숲이라는 원초적인 공간 속에서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숲은 그들을 애욕적 대상이 아닌 생존의 주체로서, 더 나아가 숲이 주는 본연의 생명력을 그대로 내재한 존재로서 거듭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에는 삶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경계를 무화하고, 그 혼재성 자체를 내면화하는 강인한 역동성이 표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2021 정용일 중견작가 초대기획전-4] 삶의 경계 – 生
(출처: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유튜브 계정)
삶의 경계-生, Oil on canvas, 228x147cm, 2021
삶의 경계-生, Oil on canvas, 259x182cm, 2021
삶의 경계-生, Oil on canvas, 162x112cm, 2021
삶의 경계-生, Oil on canvas, 228x147cm, 2021
삶의 경계-生, Oil on canvas, 182x260cm, 2021
기획전시장에서 관객들에게 전시 설명을 하고 있는 정용일 작가의 모습
(사진 제공: 정용일 작가)
마흔 넷, 첫 번째 터닝 포인트
나는 무엇보다 정용일 화백의 터닝 포인트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그의 이력에서 가장 독특한 지점은 아무래도 그의 파리 생활일 것이다. 마흔 넷, 그는 상당히 늦은 나이에 홀연히 파리로 떠나 그곳에서 약 5년 동안 유학 생활을 했다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이미 촉망받는 화가로서 자리를 잡았던 그로 하여금 낯선 땅으로 발을 내딛도록 만들었던 동력이 궁금했다.
초등학교 미술 담당 교사였던 부친의 영향 아래에서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렸고,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화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에게 가장 행복한 놀이였고 일상이었다. 어린 그에게 자유공원에서 차이나타운으로 이어지는 이국적인 공간은 가장 매력적인 작업실이 되었다고 한다. 자유공원에서 울리는 12시와 5시 사이렌 소리를 벗 삼아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다가 바다에 황포돛배가 떠다니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마감했다고 한다. 그에게 방랑이라는 자신도 모르던 꿈이 생긴 것은 아마도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뿌리는 ‘한국성’ 그 자체였다. 그가 대학 졸업 후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던 1980년대는 한국성을 찾는 것이 미술계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기 때문이다. 그 역시 이러한 당대의 트렌드 안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물론 이런 것이 자칫 소재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는 표면적인 한국성보다 정신적인 부분에서 자신의 길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때 그에게 다가온 것이 바로 ‘무속’이었다. 전통적인 그림을 탐구하고 그 안에서 현대성을 발굴하고자 하는 것으로 그의 30대가 채워졌다.
그는 때로 굿판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는데, 어느 날 문득 굿판에서 울리는 노래 한마디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바로 ‘대문 밖이 저승’이라는 말이었다. 그때부터 초월적 존재에 대한 그의 탐닉은 그의 작품 세계를 가로지르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단순한 ‘무(巫)’가 아닌 그 본질을 발견하고자 노력했고, 그 초월적인 접신(接神)의 공간으로서 ‘숲’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에게 ‘숲’은 일종의 중간 길이었다. 이승과 저승의 사이, 산 자와 죽은 자가 맞부딪치는 공간, 그러므로 생과 사가 뒤엉킨 공간으로서 숲은, 이렇게 벼락처럼 그의 세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염원. 75x55cm.
water colour on paper. 1985
별을 따는 사람. 145.5x112cm.
Acrylic on canvas. 1997
무지개 여행. 112x162cm.
Acrylic on canvas. 1997
여행, 112x162cm,
Acrylic on canvas, 1997
(사진 제공: 정용일 작가)
파리에서 마주한 강렬한 죽음의 색채, 그리고 생명력
그러나 오늘날 같은 그의 세계가 완성되기까지는 그의 방랑도 개입되었다. 44세, 미술계에서 촉망받는 화가였지만 그는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 세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무작정 작품을 배에 싣고, 6개월짜리 어학코스를 발판으로 겁 없이 파리에 발을 들였다. 그것이 1998년이었다. 돌이켜 보면 너무나 무모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내와 아이들을 한국에 두고, 혼자 내디딘 파리에서의 시간이 찬란하지만은 않았다. 어찌 외롭고 무겁지 않았으랴.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걷고 또 걸었다고 한다. 파리1대학원에 입학하고 적을 둔 후에도 그의 걷기는 계속되었다. 그래야만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새로운 각성은 늘 뜻밖에 시작되었다.
1999년 12월, 파리에 몰아친 태풍은 하룻밤 사이에 거리의 풍경을 뒤바꾸었다. 물과 바람이 휩쓸어 온 온갖 것들이 뒤엉킨 거리.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 화백은 거대한 나무들이 조각나서 굴러다니는 그곳에서 강렬한 생명력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생명이 파괴되고 조각난 곳에서도 한 존재의 생명력은 결코 꺾이지 않은 채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한 각성은 프랑스 꼬냑을 방문하면서 한층 더 강렬해진다. 지인들과 꼬냑 지방에 여행을 갔다가 그는 파리의 거리에서 발견했던 그 생명력을, 안개 속에 잠긴 꼬냑의 숲에서 다시금 발견하게 된 것이다. 마치 지구가 자전하면서 확 쏠린 것처럼, 강렬한 생명력으로 뿌리내린 숲에서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그가 나무의 생명력에 새롭게 매달리게 된 것은. 나무는 멈춰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계속 생동하고 변화하는 존재였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도 나무는 꿈틀거리며 변화하고 있었고, 그것 자체로 또 다른 생명체로 변신하는 것 같은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강렬한 생명력의 발견도 예술가의 뿌리 깊은 우울을 다 해소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아니 오히려 강렬한 생명력 앞에서 그는 더 큰 고독을 자각했던 것 같다. 파리로 돌아와 그림에 매진하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집 앞 건물의 처마 끝에서 오싹한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지독한 향수병과 함께 공황장애로 정신적인 어려움을 느끼던 순간, 그는 한국행을 결정한다. 사실 나무의 강렬한 생명력을 발견한 순간, 이미 그가 어디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하늘로 올라가는 빨강꽃. 65x50cm.
Acrylic on canvas. 1999
물질적 상상력의 순환.
Oil on canvas.81x116cm. 2001
(사진 제공: 정용일 작가)
다시 한국, 그리고 아트플랫폼
파리에서의 생활을 접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 각성 때문이었으리라. 한국에 돌아온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소나무였다. 사시사철 푸른, 그 한결같음은 또 다른 의미에서 강렬한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숲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정용일 화백의 작품은 이전보다 더 미술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중요한 갤러리에 소속된 작가로서 다양한 전시회를 열면서 작가로서 충분한 기반을 다졌다. 그런데 다시 10년, 그는 또 다른 격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대로 주문받는 그림만 그리는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지금 도착한 이 세계에 그대로 머물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어느 순간 갤러리와 고객만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2012년에, 인천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인천아트플랫폼의 입주작가에 응모하여 선정된 것은 그의 두 번째 터닝 포인트였다. 그곳에서 실험하고 싶었던 모든 것들을 자유롭게 시도해보았다. 200호짜리 점묘화로 오대산 전나무숲을 그린 것이 대표적이었다. 일반 갤러리에서라면 시도할 수 없는 작품이었기에. 그것은 스스로 자유를 찾았다는 선언 같은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 시간이야말로 현재의 저력을 만들어주었다고, 정 화백은 만족스럽게 곱씹었다.
숲의 신전-새벽, 259x182cm,
Acrylic on canvas, 2012
숲의 신전-빛의 향연, 259x182cm,
Acrylic on canvas, 2012
(사진 제공: 정용일 작가)
옥천, 다시 숲으로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 기간이 끝나고 6개월, 그에게는 또다시 고뇌의 시간이 찾아든다. 숲을 그리고 있는 자신이, 왜 숲이 아닌 도시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 내면의 의문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때마침 아내가 시골로 가고 싶다는 말을 던지고, 그는 단숨에 작업실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때 발견한 곳이 바로 지금의 작업실이 있는 옥천이었다. 산 중턱에 있는 마을을 보면서 ‘여기서 딱 10년만 작업을 하자.’라는 마음이 생겨났다고 한다. 처음에는 옥천의 산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산이 그의 마음에 충분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야산의 특성상 숲의 생명력이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달에 한두 번은 제주를 방문하면서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벌판과 산을 스케치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채워나갔다.
그래서일까? 그는 오랜 시간 숲을 그려왔지만 <낯선 숲에서>라는 작품을 기점으로 화풍에 많은 변화를 드러내게 되었다. 이 작품은 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스스로를 내팽개치듯, 그러나 정말 그리고 싶어서 미친 듯이 매달려서 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팬데믹이라는 상황 속에서 느낀 격한 감정을 표현해내고 싶었다.
사실 삶과 죽음이라는 그의 오랜 주제가 더 강력해진 것에도 팬데믹의 영향이 컸다. 그는 언제나 인간 내부에 삶에 대한 욕망과 죽음에 대한 욕망이 동시에 꿈틀대고 있음을 인식하였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 속에 표현해내고자 했다. 이것이 뒤엉킨 인간의 존재는 그 자체로 우주의 일부이자 우주의 전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1대1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동시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낯선 숲에서> 담아내고 있는 ‘낯섬’은 결코 분리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자각하지 못했던 낯섬, 그래서 조금만 가까이 다가서면 이내 반갑고 익숙해져 있는 친숙함. 그 모든 감정과 자각이 뒤엉킨 공간으로서의 숲을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그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제 고향에서 나의 작품 세계를 뿌리내릴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2022년 인천문화재단에서 수여하는 ‘우현 예술상’을 수상한 그의 소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번 상의 의미를 또 다른 시작점으로 본다고 말하였다. 그는 자신의 지난 여정을 방랑이었다고 정리한다. 그리고 이번 상은 어쩌면 그 방랑에 대한 인정이자, 하나의 마무리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제 그만 방랑하고 자신을 키워주고 성장시킨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그곳에서 지금까지의 작품 세계를 더 깊이 뿌리내리고 숙성시키고 완성해야 한다는 과제를 부여받았음을 말이다. 이제야말로 수십 년의 공부를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정 화백의 모습은 여전히 청년 그 자체였다.
그는 강조한다. 화가가 사람에게 감동을 주려면 결국 ‘구도자의 길’을 가야 한다고. 하지만 길을 찾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길을 찾든 못 찾든, 혹은 길을 잃어버리든, 중요한 것은 끝까지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그 과정이라고 역설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받고, 동시대인과 소통하고 호흡하면서 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화가의 숙명인 것이다.
낯선 숲에서, charcoal on canvas, 181x454cm, 2022
낯선 숲에서, 227x182cm, charcoal, oilbar on canvas, 2022
낯선 숲에서, 182x518cm, charcoal, Acrylic on canvas, 2022
낯선 숲에서, 80x130cm, charcoal on canvas, 2022
낯선 숲에서-生.Oil,charcoal on canvas.259x182cm.2021
한 생을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해준 거센 바람 앞으로, 또 다시
정 화백은 이제야 그 숲의 입구에 도착한 것 같다고 말한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켜켜이 쌓아 올렸던 시간의 단층들을 통해 이제 겨우 어느 숲의 시작점에 한 걸음을 내디딘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내년 봄에는 인천에서 다시 작업을 시작할 것임을 밝혔다.
그런 그에게 인천의 의미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인천은 그가 살아가는 저력을 만들어준 곳이다. 어릴 적 몸으로 부딪쳤던 겨울의 찬 바닷바람, 그럼에도 나아가야 했던 수많은 경험은 그의 오늘을 만들어 준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인천은 이 한마디로 정의된다. “내가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해 준 거센 바람.”
정용일 화백이 다시 마주할 인천의 해풍 앞에서 그의 작품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까? 이것이야말로 여전히 청년의 모습인 정용일 화백의 내일이 더 기대되는 이유일 것이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