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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떠난 남자와 남은 사람들
극단 십년후, <아름다운 축제>
이재은 (소설가)
연극 <아름다운 축제>의 키워드는 ‘시한부, 아버지, 죽음’이다. 이야기는 아버지 강 씨의 장례식장에서 시작한다. 죽음을 맞아 예를 치르는 풍경은 집집마다 다를 텐데 이 가족에게도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다. 죽은 자의 누이동생인 ‘고모’는 오빠를 향한 애도보다 산 자를 기다리는 일에 매달린다. 그녀는 민우가 오고 있는 게 맞는지 반복해서 물으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녀가 애타게 부르는 사람은 망자가 된 오빠의 아들 민우. 민우는 언제 오는 걸까? 아버지가 죽었는데 아들은 왜 이토록 늦는 걸까?
연극이 시작되면 관객들은 ‘시한부, 아버지, 죽음’의 사실적인 단어 대신 ‘떠남, 관계, 소통’이라는 사유적 키워드가 새롭게 던져졌음을 알게 된다. 그러곤 무대 위 배우들과 교감하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데 그 중심에는 가족과 현실, 현실 너머의 초월적 만남이 있다.
떠난다, 떠나지 않는다
떠나는 것은 이쪽이 아닌 저쪽과 다른 쪽, 이곳이 아닌 그곳과 저곳, 여기가 아닌 저기와 거기를 향해 가는 일이다. 사전에는 ‘벗어나서 더이상 그곳에 있지 않게 되다’, ‘벗어나 관계를 끊다’, ‘움직여 가다’라는 뜻이라고 적혀 있다. ‘벗어남’이라는 수식에서 알 수 있듯, 떠나는 행위에는 갈망과 탈피, 자리바꿈의 욕망이 내포돼 있다. 연극에서 ‘떠남’의 행위는 아버지 강 씨로 움직임으로 표현된다.
아버지는 두 번 떠난다. 이승에서 집을 한 번 ‘떠나고’ 그렇게 홀로 세상을 헤매다가 그다음에 저승으로 ‘떠난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강 씨 역시 결혼해 두 자식을 두고 사진작가로 살아왔으나 얼마 전 아내를 잃고, 설상가상 6개월밖에 살지 못하리라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죽음이 멀지 않았다고 느낀 강 씨는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남은 날들만큼은 내 뜻대로 세상을 살아볼 수 없을까?
머물던 곳을 떠나 산으로, 바다로 간 아버지는 자신의 떠남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도망이나 탈피가 아닌 자유와 해방, 모험으로 감각하지 않았을까? 떠난 사람은 이동하는 존재다. 움직이는 인간은 멈춰 있는 자의 고요와 정지, 마비를 쉽게 예측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강 씨는 자신의 결정을 허락받기는커녕 누군가에게 알린 적도 없다. 그는 불쑥 출발했고, 그가 계속 ‘여기’에 있길 바랐던 가족들은 그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았다. 무릇 부모라면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을 돌봐줘야 한다고 믿었던 아들은 극심한 배신감을 겪는다. 고등학생인 아들은 시종일관 삐죽삐죽하게 날을 세우다가 아버지와 맞대한 자리에서 아버지의 얼굴에 물을 끼얹기도 한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여느 부자들처럼 눈빛을 마주치지 못했으며, 대화를 익히지 못했고, 그러므로 어떤 소통 방법도 알지 못했다.
극단 십년후 <아름다운 축제> 공연 모습
(사진 제공: 극단 십년후)
가족과 가족 아님의 희비극
강 씨가 가족들에게 ‘제대로’ 자신의 마음을 설명했더라면 사정이 달라졌을까? 강 씨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가족들은 측은지심을 베풀며 강 씨의 떠남을 지지했을까? 평생 가족과 함께 살았지만 떠나기로 결심한 순간 아버지 강 씨는 혼자였다. 가족과 떨어진 그는 혼자였지만 또 혼자가 아니었는데 뱃사람으로 살면서, 산속 절에서 지내면서, 화장터에서 수많은 시체를 태우면서 늘 ‘사람’과 함께 있었다.
타인이 언제나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이따금 강 씨를 돋보이게 하고, 두드러지게 했다. 외국인 노동자를 천대하는 문화에서 “그럼 내가 시체를 건지겠다”고 나선 사람도 강 씨고, 돈을 밝히는 스님에게 서먹함을 느끼다가 금전에 대한 스님의 집착이 고아들을 맡아 기르는 데서 비롯됐음을 알고 자신의 편협을 반성한 사람도 강 씨다. 생전의 마지막 직장이었던 화장터에서는 귀신의 기척을 감지하고 그들에게 말을 걸거나 마음을 헤아리기도 하는데 그런 강 씨를 보고 있노라면 관객은 ‘마침내’ 강 씨를 알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아들 민우와 달리 큰딸 민주는 아버지에 대한 불평이 크지 않다. 그녀는 화장터로 아버지를 찾아가는데 자신을 찾아온 딸에게 강 씨는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한다. 의복을 단정히 한 아버지가 연두색 벤치에 앉아 두 주먹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모으자, 민주는 자세를 낮추고 카메라를 든 채 그를 마주한다. 사진 찍기는 아버지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수십 년간 했던 노동인데 이제 딸이 그 일을 하고 있다. 그런 딸에게 아버지는 “내 영정 사진으로 쓸 것”이라고 말하고, 딸은 아버지의 차분하고 희미한 목소리에 눈물을 흘린다.
극단 십년후 <아름다운 축제> 공연 모습
(사진 제공: 극단 십년후)
영영 떠나지 않을, 여기
<아름다운 축제>는 2021년 인천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았고, 2022년 인천문화재단 예술표현활동 지원사업에 선정됐다. 극단 십년후 대표이자 연출을 맡은 송용일은 “죽음이란 소재는 우울을 연상케 하지만 밝고 경쾌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죽음은 삶의 단절이 아닌 또 다른 삶을 이어주는 연속성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극에서 죽은 자는 검은 옷이 아닌 흰옷을 입고 등장한다. 겹겹이 주름 잡힌 풍성한 옷을 펄럭이며 어릿광대와 개구쟁이 같은 모습으로 무대 위를 뛰어다닌다. 피에로 복장을 한 귀신, 수다스러운 귀신, 생동감 있는 귀신은 죽음을 두려운 것이 아닌 당연하고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귀신이 초자연적 요소일 수는 있어도 공포의 대상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장례식장을 기본 세팅으로 한 무대는 야외 테이블, 평상, 시신용 침대, 벤치 등을 배치함으로써 장면 전환을 시도한다. 장소의 다양성은 영상으로도 재현되며 도시와 자연의 이미지가 스크린 가득 배경으로 깔린다.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는 죽음 뒤에 찾아온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아들은 끝내 아버지를 알아주지 못했다. 귀신이 된 아버지가 육신이 빠져나간 몸으로 아들을 안자 아들은 그의 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오열한다. 강 씨는 가족을 지키며 더 살기 위한 투쟁으로 병마와 싸우는 대신 남은 삶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했다. 눈에 띄는 성과가 있든 없든, 긍정하는 사람이 있든 없든 자기만의 ‘자유와 해방, 모험’을 얻었다.
푸른 나무 한 그루. 나무는 자라고, 또 자라서 언젠가 생명을 다하겠지만 그 일은 ‘현재’의 고려사항이 아니다. 여기 나무가 있는 것은 영원히 떠나지 않을 아버지가 있는 것과 동일한 의미여서 가족들은 기꺼이 행복을 만끽한다. 소풍 온 기분으로 밥을 먹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 작고 아름다운 축제는 생사(生死)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을 아는 자들만의 것이다.
극단 십년후 <아름다운 축제> 공연 모습
(사진 제공: 극단 십년후)
이재은 (李在恩, Lee Jae Eun)
소설가. 소설집 『비 인터뷰』, 『1인가구 특별동거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