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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강현실로 만나는 부평의 역사유산, 부평지하호
조건
매년 학생들과 함께 부평 함봉산 지하에 있는 역사유산을 찾는다. 부평문화원 김규혁 과장의 도움을 받아 한 걸음 한 걸음 ‘땅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멈춘 어떤 곳”에 도착하게 된다. 그는 땅 속 맨 끝자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학생들의 손에 들렸던 조명을 모두 차단시킨다. 그리고 이들에게 칠흑 같은 어둠을 체험토록 한다. 학생들은 빛이 사라진 곳에서 일시적인 시간과 공간의 정지를 경험한다. 좀 근사한 말로 표현하자면, 역사적 사실을 추체험(追體驗)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평문화원은 땅 속에 있는 이들 역사유산을 ‘부평지하호’라고 명명했다. 원래는 ‘동굴’, ‘토굴’ 등으로 불렀으나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침략전쟁을 지속할 목적으로 굴착했다는 것이 밝혀진 뒤로 이름을 바꿨다. 부평지하호는 일제 말기 부평지역에 있었던 인천육군조병창의 지하화를 위해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인천육군조병창과 관련한 지하시설인 부평지하호는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이 남긴 결과물이자 강제동원의 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중요한 역사유산이다. 부평문화원은 이러한 부평지하호의 실체를 지면 위로 노출시키고 그 역사를 시민과 학생들에게 알리고 있다. 1945년 8월 강제동원되었던 식민지민이 되어 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부평지하호에서 김규혁 과장의 설명을 듣고 있는 학생들
ⓒ조건(2023.11.11.)
부평지하호 끝자락에 둘러선 학생들
ⓒ조건(2023.11.11.)
학생들에게 이날의 경험은 오래도록 짙게 남을 것이 자명하다. 강의실에서는 이렇듯 짙은 인상을 만들기 어렵다. 말과 글, 그리고 약간의 사진과 영상으로는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역사 현장과 유산을 학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었으면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역사의 현장을 직접 가서 볼 수 없다면 차선책이 필요하다. 과연 체험을 대신할 최선의 방책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가장 근사한 대안은 역사 유산과 유사한 환경을 매체를 통해 제공하는 것이다. 실제와 유사한 인공 환경을 구현하는 가상현실(VR)과 현실 세계의 환경에 가상의 정보를 투사한 증강현실(AR), 나아가 혼합현실(MR), 확장현실(XR) 등을 활용하는 것이다. 특히 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환경에 정보를 담아내는 증강현실 기술은 학생들의 추체험 활동에 매우 효과적이다. 마치 게임을 하는 듯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활용해서 역사적 현장을 체험할 수 있게 마련된 역사유적 증강현실은 앞으로 디지털 AI 교육시대에 필요불가결한 교육방법이 될 것이다.
부평문화원에서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일찍이 증강현실을 활용한 부평지하호 체험 프로그램 ‘부평지하호 VR 투어’를 마련했다. 부평문화원 홈페이지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은 직접 지하호를 체험할 수 없는 시민과 학생들에게 최선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웹페이지 첫 화면을 클릭해서 들어가면 부평 함봉산을 중심에 두고 입체적으로 구현된 부평 일대 지리 환경을 사방팔방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부평지하호의 여러 위치와 지형의 실제 모습 등이 한눈에 보이는데 실상 이러한 접근은 직접 답사를 통해서도 확인하기 힘든 것들이다.
다음으로 지하호의 실제 모습을 체험할 수 있도록 C구역 6번 지하시설을 대상으로 증강현실을 구현해 놓았다. C구역 6번 지하시설의 입구부터 천천히 클릭을 통해 한 걸음 한 걸음 직접 체험하듯 접근할 수 있다. 지하호의 실제 모습을 360도로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하호와 유사한 환경의 동굴에서 들릴 것만 같은 물방울 소리를 구현했고, 곳곳에 유산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들을 배치하고 있다.
부평지하호 VR 투어 웹페이지 ⓒ부평문화원
부평지하호 VR 투어 첫 화면 ⓒ부평문화원
부평문화원의 ‘부평지하호 VR 투어’는 증강현실을 통해 역사유산을 간접 체험할 수 있게 하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기술적으로 보완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시도 자체가 갖는 의미는 적지 않다. 역사 현장이 주는 직접 체험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몇몇 측면에서는 주목할 만한 부분도 있는 것이다.
첫째, 역사현장을 안전하고 정돈된 환경에서 최대한 ‘현실’과 가깝게 체험할 수 있다. 특히 부평지하호의 경우 지하시설이라는 특성상 여러 안전상의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부평문화원 측에서는 이를 위해 안전모와 조명 등을 상비하는 한편 현장 답사 때마다 안전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VR 투어를 통해서는 이러한 번거로움과 위험을 피할 수 있다.
부평지하호 VR 투어의 정보 투사 사례 ⓒ부평문화원
둘째,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누구나 원하는 때 원하는 방식으로 역사 유산을 살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노트북을 통해 탐색하는 데 익숙한 세대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방식이다.
셋째,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증강현실을 활용한 교육은 학생들의 요구와 학습 방식에 부합하는 형식인 까닭에 집중과 몰입도가 높다. 또한 증강현실의 요소요소에 필요한 정보가 투사되어 있어 능동적 자기중심 학습이 가능하다는 것도 이점이다.
넷째, 증강현실의 특성상 기록적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증가현실 프로그램을 제작했던 당시 유산의 전체 모습을 그대로 박제하듯 남겨둘 수 있게 된다. 제작 당시 유산 주위의 환경, 유산의 보존 상태 및 관리 실태 등이 고스란히 기록되는 효과가 있다.
부평지하호 VR 투어에 삽입된 착암 흔적 사진 ⓒ부평문화원
부평지하호 VR 투어가 지닌 한계점도 있다. 인력과 예산의 부족이라는 쉽사리 극복하기 힘든 문제에 의한 기술적 한계는 차치하고라도 사회적 관심과 활용도 면에서 많은 보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VR 투어를 기획하고 만든 측의 한계라기보다 인천시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현실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부평지하호 VR 투어는 단순히 증강현실을 통해 역사유산을 구현했다는 측면뿐만 아니라 그동안 우리 학계와 사회의 관심 밖에 있었던 일제 말기 침략전쟁의 유산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른바 ‘부정적 역사유산’을 매우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활용하려는 시도였다. 부평의 지역사회가 함께 해당 역사적 사실과 유산을 보존하고 교육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VR 투어는 그 다종다양했던 노력 중 하나의 결과물이었다. 부평지하호 VR 투어를 더욱 고도화하고 잘 활용하기 위한 정부 지자체, 그리고 시민사회 및 학계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조건(曺健, Cho Geon)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
동북아역사재단 교육연수원 연수운영위원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
국가보훈부 자체평가위원
sophrosyne@dongguk.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