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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에 의한, 주민들을 위한, 주민들의 박물관 ‘에코뮤지엄’
홍봄
지역공동체 참여로 만드는 지붕없는 박물관
‘지붕없는 박물관’은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강화도를 지칭할 때 자주 나오는 말이다. 다양한 역사적 흔적과 문화를 간직한 곳, 지역 자체의 문화자원이 풍부한 곳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지붕없는 박물관은 ‘살아있는 박물관’이나 ‘에코뮤지엄(Ecomuseum)’이라는 단어와도 함께 쓰이곤 한다. 단일 공간을 넘어 열린 환경에서 유산을 보전하고 활용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의미를 가지지만 에코뮤지엄의 경우 ‘주민’이라는 요소가 더해진다.
에코뮤지엄은 생태 및 주거환경을 뜻하는 ‘에코(eco)’에 박물관이란 뜻의 ‘뮤지엄(Museum)’이 결합된 단어다. 이 개념을 도입한 프랑스의 박물관학자 조르주-앙리 리비에르(Georges- Henri Rivière)는 ‘에코뮤지엄의 발전적 정의’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 에코뮤지엄은 행정당국과 주민이 같이 구상하고 만들어 활동하는 수단이다. 행정당국은 전문가와 함께 편의를 도모하고, 재원을 제공한다. 주민은 각자의 흥미에 따라서 자신들의 지식과 대처능력을 제공한다.
– 에코뮤지엄은 이러한 주민이 스스로를 인식하기 위해서 서로를 바라보는 거울이다. 거기에서 주민은 자신들이 살아왔고, 살고 있고, 또 살아갈 지역을 세대의 연속성이나 비연속성을 통해서 이전 세대 주민의 설명에 이어서 설명을 하려고 노력한다.
주민이 스스로 지역의 유산을 보존하고, 연구하고, 배우는 보존기관이자 연구소라는 의미다.
<지역재생을 위한 에코뮤지엄 개념 적용에 관한 연구(이지미, 2323)>에서는 에코뮤지엄을 구성하는 3가지 기본 요소로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유산의 보존 ◆주민참여 ◆박물관 활동을 꼽았다.
즉, 에코뮤지엄의 목표는 유산의 현지 보존을 위한 지역공동체의 자발적 참여, 이에 기반한 수집, 관리, 보존, 조사, 연구, 전시, 교육 등 박물관 활동을 통한 지속가능한 지역발전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시도된 최초의 에코뮤지엄을 강원도 태백시의 ‘철암빌리지움’으로 본다. 강원도 철암은 1970~80년대에는 탄광지역으로 매우 활성화되었으나 1990년대 이후 폐광지역으로 전락하는 위기를 겪으면서 지역 전체가 쇠퇴를 경험한 곳이다.
철암탄광역사촌 ©태백시
<한국에서 에코뮤지엄의 수용과 적용 과정: 철암빌리지움에서 철암탄광역사촌까지(배은석, 2023)>에 따르면 철암에서는 1998년부터 탄광촌 전체를 박물관으로 구상하는 에코뮤지엄을 구현하는 것에 대한 토론과 모색이 있었고, 2001년에는 철암 건축도시 작업팀과 태백의 시민단체가 ‘철암빌리지움’이라는 이름으로 실험을 전개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에코뮤지엄 시도는 광부 공동체를 비롯한 주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로 짧게 마감했지만 이후 철암탄광역사촌의 탄생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금도 여러 지자체들이 에코뮤지엄을 표방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에코뮤지엄이라는 명칭으로 지속적으로 사업을 이어가는 사례는 경기도의 경기에코뮤지엄이 대표적이다.
일상의 발자취를 ‘지붕없는 박물관’으로, 경기에코뮤지엄
2016년 경기서부(경기만) 권역에서 시작한 경기도의 에코뮤지엄은 2019년 경기북부(DMZ), 2021년 경기남동부(한강수계) 권역으로 확장하며 경기도 전역에 산재한 지역자원과 의제를 조사, 연구했다.
지붕없는 박물관(경기에코뮤지엄) 사업을 위한 에코뮤지엄 세 가지 축 재해석.
경기문화재단 <2023 지붕없는 박물관 이야기> 발췌
이러한 지역 활동에 있어 주민이 중심이 되고, 예술 및 학술 전문가와 함께 지역을 예술적으로 해석하고, 공공부문과 협업하며 삶의 현장을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사업으로 방향성을 다져왔다.
2023년도 지붕없는 박물관(경기에코뮤지엄) 사업은 경기도 내 19개 시군에서 총 30개의 거점공간을 운영하는 단체들과 함께 진행했다. 단체들은 지역 주민과 전문가의 협업을 통해 지역에서 지켜나갈 가치가 있는 문화·생태자원을 일상활동과 연계해 발굴·관리·연구·활용했다.
파주 DMZ에서는 지난해 ‘DMZ 산보’라는 사업명으로 한반도 비무장지대 일대의 식생과 민간인통제선 안쪽 해마루촌에 자리한 유산들을 찾아 지역주민의 해설과 함께 산책하는 프로그램을 구상했다. 연천에서는 ‘타운.호프.뉴.2023’ 사업을 통해 접경지역 수복지구, 신망리의 문화와 역사를 가시화하는 활동을 했다.
파주 DMZ 산보 ©경기에코뮤지엄 홈페이지
시흥에서는 지역 유산인 옛 소래염전의 기억을 이어가는 문화예술프로그램을 주민들이 기획하고 연습한다. 안산의 선감학원, 평택의 기지촌과 같이 기억해야 하는 아픈 역사를 주민들 주도로 알리는 사업을 하는 곳도 있다. 재개발과 관광지화로 사라지는 지역의 모습과 흔적들을 지키기 위한 에코뮤지엄, 지역의 자연과 사람 이야기를 담아내는 에코뮤지엄이 도내 곳곳에서 펼쳐졌다.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8년간 경기에코뮤지엄에 지원된 예산은 도비와 시비를 포함해 총 153억 9천200만 원이었다. 각 지역 거점공간을 중심으로 한 사업뿐만 아니라 시민활동가 역량강화를 위한 네트워크 구축과 컨설팅, 마케팅 등을 지원했다.
천혜의 자연과 지켜야 할 지역문화, 인천에 그린 에코뮤지엄
인천지역은 168개 섬이 갖는 천혜의 자연경관과 서해의 해양·역사문화, 전통이 깊은 원도심, 도시 변화를 보여주는 역사 현장들을 통해 살아 숨 쉬는 박물관으로 평가된다.
그동안은 다양한 유·무형의 문화자원과 자연자원, 역사자원이 있음에도 이를 융합적으로 관리하고 지속가능한 활용 계획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주민들과 지역공동체가 중심이 된 지역문화 정체성 확립과 문화자치의 필요성 또한 높은 상황이다.
이러한 점을 보완하자는 측면에서 인천에서도 에코뮤지엄 개념을 도입하는 방안이 검토됐다. 지역 내 다양한 자원 중 ‘지붕없는 박물관’,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강화도가 다뤄졌다.
강화고인돌 ©인천관광공사
인천연구원의 <강화지역 자원의 융합적 활용 위한 에코뮤지엄 모델 적용 방안(최영화, 2018)>에서는 “주민참여형 대안박물관인 에코뮤지엄을 운영함으로써 지역공동체가 형성되고 주민의 문화자치 역량이 성장할 수 있으며 관광산업과의 연계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짚었다.
연구에서 분석한 강화의 자연자원은 2008년에 람사르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매화마름 군락지와 한강하구 습지보호지역이 있으며, 강화갯벌은 천연기념물 저어새의 번식지로서 생태자원이자 교육자원으로서 가치가 높다. 마니산을 포함해 16개의 산지와 15개소의 공원, 20개 코스의 강화나들길, 동락천생태문화로 등의 녹지공간을 다양하게 보유했다.
강화갯벌 ©인천관광공사
역사자원으로는 당시 기준 총 112개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문화자원 중 총 10개의 문화기반시설이 있었다. 에코뮤지엄의 핵심인 주민조직, 인적자원으로는 비영리민간단체 29개, 사회적기업 3개, 협동조합 24개가 있으며, 이 중에서 에코뮤지엄과 연계 가능한 민간조직으로는 비영리민간단체 17개, 사회적기업 3개, 협동조합 10개를 파악했다.
이 연구에서는 강화 에코뮤지엄의 추진과제로 5대 추진전략을 구분해 제시했다. ◆강화 에코뮤지엄 지원조례 마련 ◆거점센터 지정 및 단계적 확산 ◆박물관 섬 브랜드 사업 발굴·홍보 ◆주민친화사업 통한 주민참여 확대 ◆중앙-인천-강화 관련부처 예산 확보) 등이다. 추진 전략에 따른 단계적 추진방안도 마련했다.
강화에코뮤지엄 단계적 추진방안.
<강화지역 자원의 융합적 활용 위한 에코뮤지엄 모델 적용 방안(최영화, 2018)> 발췌.
연구에서는 “에코뮤지엄은 민관협치모델로 운영되어야 하므로 지원조례도 관 주도로 제정하기보다는 토론회·공청회 등의 소통기회를 마련해 민간전문가와 시민의 의견을 수렴할 필요가 있다”며 “에코뮤지엄은 기존에 인천시에서 도입한 바 없는 새로운 모델이므로 초기 사업 추진을 전담할 전문성 있는 운영조직을 구성할 필요가 있고, 거점센터의 핵심자원 유형에 따라 강화역사박물관, 인천문화재단,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등 기존 기관과의 연계, 위탁을 통한 추진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인천에코뮤지엄, 민관협력 기반한 구체적 실천계획 필요
인천에코뮤지엄 조성의 필요성은 전문가들과 시민사회에서도 나왔다.
인천시의회와 인천근현대산업문화유산보전연대가 2022년 주최한 ‘근현대 산업문화유산 보전 방안 토론회’ 에서는 전문가들은 인천 근현대 산업·문화유산 보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의 하나로 에코뮤지엄을 제안했다.
이 토론회에서는 일제강점기 ‘동양방적’으로 시작해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동일방직 인천공장, 부평미군기지(캠프마켓)에 남아 있는 일제 군수공장인 조병창이 대표적 산업문화유산 사례로 소개됐다.
동일방직 전경 ©인천시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발제를 통해 “인천 모든 지역을 고층 아파트촌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며 “프랑스 파리처럼 파리 옛 경관보존지역과 외곽 ‘라 데팡스'(고층 건물을 허가한 신도시) 지역으로 구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도시 재건축에서 ‘점'(건축물 등) 단위 근대 문화재도 보존해야 하지만, 개발로 사라질 도시민속과 지역 문화공동체를 지속으로 유지해 나갈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인천의 정체성을 살려내는 에코뮤지엄으로의 실천이 필요하다”고 했다.
민운기 스페이스빔 대표 역시 ‘인천에코뮤지엄’을 지속적으로 제안해 왔다.
산업유산을 비롯한 지역 고유의 문화자산에 대한 통합적 아카이빙 구축이 필요한데, 그 방안으로 인천에코뮤지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에코뮤지엄을 지역공동체 스스로가 자신의 지역을 깊이 이해하고 유산을 보전하는 순환 시스템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민 대표는 ‘배다리 도시학교’와 같이 에코뮤지엄과 궤를 같이하는 민간차원의 프로젝트들을 진행했다. 배다리도시학교가 진행한 ‘인천 에코뮤지엄 플랜_Research&Tour’에서는 경인전철을 기점으로 해안부 지역을 ◆월미도 일대 ◆내항·남항·인천역 일대 ◆북성동 일부와 만석동 일대 ◆화수동 일대 ◆송현동과 화평동 일대 등 다섯 개 권역으로 나눠 조사한 결과를 ‘주름진 바닷가 겹겹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자로 펴내기도 했다.
<주름진 바닷가 겹겹의 이야기> ©스페이스빔
지역 곳곳에 깃든 역사·문화·산업·노동·생활·공동체에 관한 각각의 장소와 건물, 시설, 이야기 등 90여 개를 선정한 뒤 조사하고 정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반 시민과 학생, 예술가들이 포함된 10여 명의 참가자들이 5명의 관련 전문가의 지도와 함께 현장 탐방과 더불어 조사·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 현장과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넘나들며 새로운 자기 학습과 이해를 도모하고, 또 다른 관심과 개입의 여지를 찾았다.
민 대표는 “에코뮤지엄은 각 지역이나 도시가 가진 자연, 역사, 문화 다양한 유산들을 어떻게 주민들이 보존하고 가꾸고 활용하면서 바람직한 도시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차원인데 인천은 그 여느 도시 못지않게 자원이 풍부하다”며 “이런 자원들이 개발의 논리로 훼손되고 철거되고 사람들은 쫓겨나고 그런 것들이 안타까워서 에코뮤지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해왔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노력들이 민간에서만 이뤄지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큰 틀에서의 방향전환과 시민들의 공감대 형성, 민간 협력이 함께 이뤄지지 않으면 구체적인 계획 추진이나 실천이 어렵기 때문이다. 에코뮤지엄 개념을 만든 조르주-앙리 리비에르 역시 ‘행정당국과 주민이 같이 구상하고 만들어 활동하는 수단’이라고 에코뮤지엄을 정의하기도 했다.
민 대표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지역의 역사유산과 문화유산을 전수조사했고 발표도 많이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며 “지금부터라도 그동안 했던 것을 토대로 중장기적인 계획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봄 (洪봄, Hong Bom)
비영리 독립언론 ‘뉴스하다’ 기자. 인천경기탐사저널리즘센터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