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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기입되는 장소들, 자유공원과 수봉공원
김민관
인천에 대한 정체성 또는 이미지는 다양하다. 인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로 과반수가 ‘바다’나 ‘항구’, ‘섬’이라는 조사1)는 해양도시로서 인천의 이미지를 반증한다. 비교적 최근 설문에서 ‘해양도시’로서 인천의 이미지는 과반에 가까운 ‘국제도시’에 비해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2) 송도국제도시라는 인천에 관한 새로운 이미지가 끼친 영향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부산, 원산과 함께 개항장이 된 인천은 일찍이 국제도시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1) 해반문화사랑회, 『열려있는 땅, 인천』, 해반문화사랑회, 1999, p.168.
2) 손상원, 방문객이 보는 인천 이미지 “국제도시”, 인천뉴스, 2013.11.10,
동인천역과 인천역 부근에는 근대 개항 시기의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 차이나타운에 인접한 자유공원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공원으로, 각국 조계에 있던 그 원래 이름은 각국공원으로, 만국공원으로도 불렸다. 각국공원은 미국·러시아·독일·영국 사람들이 각국 조계에, 그리고 일본과 중국(청나라) 사람들이 일본 조계와 청국 조계에 각각 살고 있던 1888년, 해당 국가 외교관들의 공동 서명 아래 조성되었으며, 러시아 토목기사 사바틴(Seredin Sabatin, 1860~1921)이 측량과 설계를 맡았던바, 그 이름은 당시 개항의 역사를 그대로 발화한다. 1914년, 일제에 의해 명칭이 서공원으로 변경되었다가 해방 후 원래 이름을 되찾았던 것도 잠시, 1957년 지금의 맥아더 장군 동상이 세워지면서 자유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다.3) 6·25전쟁의 상흔과 남북 분단의 현실, 그리고 이곳의 여러 주체가 떠난 현재와 맞물려 ‘자유’라는 명칭은 다소 공허하게 들리는 듯하다.
3) 정진오, 『인천』, 가지, 2020, p.101.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
영상 <밤의 길이는 길처럼 천천히 변하고 있다>(2018)의 캡처
ⓒ김민관
인천항이 내다보이는 자유공원,
영상 <밤의 길이는 길처럼 천천히 변하고 있다>(2018)의 캡처
ⓒ김민관, 하늘색 옷을 입은 배우는 작가 임청하다.
1973년《인천시사》하권에는 인천의 명승지로 인천 여러 공원을 언급하고 있다. 그중 첫 번째가 자유공원이고, 이어 수봉공원, 도원공원, 율목공원, 동산공원, 월미도 등이 차례로 등장한다.4) 현재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는 도원공원5)과 인천 계양구의 동산공원을 제외하면, 나머지 공원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자리한다. 율목공원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 모두 4km 반경이다. 그중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수봉공원을 빼면, 자유공원·율목공원·월미도는 모두 인천 중구에 있다.
4) 앞의 책, p.100.
5) 현재의 도원공원은 아담한 아이들의 놀이터에 가까운데, 1973년 당시의 도원공원은 현재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자유공원과 수봉공원을 배경으로 작업을 한 적이 있다는 점에서, 두 공원에 각별한 기억이 있다. <밤의 길이는 길처럼 천천히 변하고 있다>(2018, 이하 <밤의 길이>), <여백>(2020)이 각각 그 부산물이다. 전자는 개인전 《밤의 길이는 밤의 두께를 상회하는가》(2018, 회전예술, 인천)에서 상영되었고, 후자는 <2020 도화가압장> 프로그램(2020, 인천문화재단 창작지원부)의 참가 팀으로서 음악가 김지효·이수빈, 그리고 안무가 정민수와 함께 ‘자연학습원’이라는 일시적 콜렉티브로 참여해 만든 공동 작업의 결과로, 당시 코로나19 여파로 온라인에서만 상영되었다. 당시 밖을 나서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꽤 조심스러웠던 시기다. 참고로 ‘자연학습원’이라는 이름은 수봉공원 내 있던 생태 구역이고, 당시 우리가 촬영했던 장소 중 하나였던 나무로 짠 책방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수봉공원 정상 가에 2023년 조성돼 올해 시범 운영 중인 스마트갤러리도서관이 눈에 띄었다.
수봉공원 숲에서 촬영한 <여백>(2020)의 현장.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는 김지효 음악가. ⓒ김민관
<여백>(2020) 촬영 당시, 수봉공원 책방에서 움직임을 펼치는 정민수 안무가.
ⓒ김민관
2018년 거처를 인천으로 옮긴 후, 개항의 특정 시기와 맞물린 장소들에 관심을 두게 됐다. 개항장이라는 키워드로 장소들을 잇고 하나의 서사를 구축하려는 열망은, 퍼포머 혹은 배우가 등장하는 <밤의 길이>를 만드는 것으로 나아갔다. 분명 영상은 역사적 장소에서 출발하지만, 어떤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풍경 이미지들의 몽타주를 통해, 그리고 내레이션의 자장 속에서 아주 미미한 것이 되거나 거대한 이름으로만 남게 되었다.
자유공원에서 인천항을 내다보는 배우의 뒷모습이 새로운 세계를 기대하는 여행자의 시점으로 옮겨졌다면, 맥아더 장군 동상과 오른팔 위에 앉은 검은색, 흰색의 비둘기 한 쌍은 보이는 그대로, 과거가 된 죽은 역사와 문명을 무심하게 넘어서는 자연의 생명력을 이질적으로 대비하는 장면 정도로 옮겨졌다. 인천은 나에게 이질적이고 생경한 곳이었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러한 심리적 기제가 영상 작업을 통해 안정화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또한 명확한 캐릭터로 구분되지 않는 여행자는 어떤 시간에 속해 있던 것일까. 그것은 일제강점기의 과거일까, 자본주의가 잠식한 시대가 낳은 새로운 관광객의 현재일까. 사실 여러 장소와 함께 놓인 각각의 뒷모습은 주체의 의식보다는 그 장소의 무의식에 대한 접근이었다. 주체는 어떤 말도 없이 각각의 풍경에 놓이고, 뭔가 그곳을 둘러보거나 하릴없이 행위를 할 뿐이다. 그 주체는 인천에 불시착한 나 자신이 반영되는 것과 다름없었던 것 같다.
<여백>은 수봉공원의 생태적 풍경에 던져진 인간 존재들의 행위를 보여준다. 우쿨렐레·멜로디카·리코더를 연주하는 이수빈, 가야금을 타는 김지효, 그리고 여러 움직임의 정민수를 담담하게 촬영하고, 책방 안에 있던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 1900~1944)의 『어린 왕자』를 꺼내 그 안에 문구를 영상 후반에 집어넣어 작업을 완성했다. 수봉공원은 자유공원과는 분위기가 자못 다르다. 대체로 운동이나 산책하기 위한 시민들이 많이 눈에 띈다. 자유공원에서는 양쪽으로 놓인 기다란 벤치를 비롯해 주로 노령층의 모습을 많이 봤던 것 같다. 미추홀구가 중구보다 세 배가량 인구가 많은 부분도 있겠지만, 수봉공원이 최소한의 산행 루트로서 공원 설계가 되어 있달까. 당시 작업에서 자연학습원이 주목했던 부분도 거리에 비해 활기를 띤 사람들과 그 주변 풍경이었던 것은, 코로나 사태에 대한 심리적 반작용의 탓도 있겠지만, 활동과 쉼이 이곳저곳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던 공원의 구조적 성격에 힘입은 바 크다. 공원의 기능이 공공의 쉼을 보장하는 물리적 토대라는 정의에 입각한다면, 이는 당연한 조건일 것이다.
자유공원에서는 맥아더 장군 동상이 가장 높이 자리한다면, 수봉공원에는 경인방송 송신소가 거대한 탑처럼 위용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양한 가치를 상징하고 주장하는 여러 근현대사의 흔적이 중첩되어 있다. 수봉공원에 현충탑(1972)·재일학도의용군참전기념비(1979)·구민헌장비(2012)·인천시장 고 김정렬(金正烈) 선정기념비(1996)·무공수훈자 공적비(2014) 등이 자리한다면, 자유공원에는 어린이헌장비(1971)·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1982)·효도권장비(1991)·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2000)·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 헌수비(2020) 등이 있다.
‘인천센트랄 라이온스클럽’에서 기증한 어린이헌장비의 존재는 다소 이색적으로 다가온다. 거기에 새겨진「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의 마지막 11조는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자라야 한다”이다. 꽤 거창한 사명이 어린이에게 주어지는데, 인구 감소의 시대에 전국적으로도 출산율이 낮은 인천, 그리고 놀이도구들이 있던 어린이 놀이터가 수봉공원으로 옮겨진6) 현재와 겹쳐 보면, 더욱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6) 양진채, 인천이라는 지도를 들고, 강, 2021, p.120. 자유공원과 수봉공원은 큰 연관성이 없는 것 같지만, 수봉공원에 있던 놀이기구들은 1982년 한미수교 백주년 기념탑이 세워지기 전까지 자유공원에 있었다고 한다.
『어린 왕자』에서 인용한 <여백>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우물을 깨운 거야. 그래서 우물이 노래를 하는 거야.” 역사는 기록을 통해 상기할 때 다른 의미로 들려오기 시작한다. 역사가 깊숙한 곳의 닫힌 세계 속 고정된 상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앞서 공원은 개인에게 쉼을 주워준다고 했었다. ‘쉼’은 망각을 요청하기보다 상기를 불러일으킨다. ‘상기’는 현재를 넘어서는 과거라는 존재를 증명한다. 그렇게 쉼을 통해 현재의 삶에 과거가 밀려온다. 자유공원과 수봉공원에 있던 수많은 기념비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인천의 여러 공원을 둘러보며, 그곳의 여러 기념비를 잇고 재의미화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김민관 (金珉寬, Kim Min-kwan)
예술을 체험하고 기록한다. 다양한 예술 관련한 아카이브에 관심을 두고 이를 실천하고자 한다. 좋은 예술이란 무엇일까라는 탐문과 함께 비평적 관점으로 동시대 예술의 계보를 재구성해 나가려고 노력 중이다. 비평·기획·창작의 교환과 매개에 대한 관심으로, 여러 작업을 병행 중이다.
mikw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