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내 기억 속의 인천 영화극장

김병훈

처음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았던 기억 중 다른 것은 몰라도 생생한 것이 있다. 몇 살 때인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인성여고 체육관으로 쓰이는 공간이 당시에는 영화상영관(시민관?)이란 기억과 “목 없는 미녀”를 보고 몹시 무서웠던 기억 두 가지다. 누구와 갔었는지도 모르겠고 당시 화수동에 큰집이 있어 그곳에서부터 자유공원 홍예문을 거쳐 걸어갔던 생각이 왜 아직도 생생한지 모르겠다. 첫 영화관에서 첫 영화와의 첫 대면이라 그런가?

“와~~ 오늘은 오전 수업뿐이다” 점심시간 후 단체 영화관람으로 키네마극장에 벤허를 보러 간다고 모두가 들떠 있었다. 영화보다 지금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 매우 흥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 한 시간은 족히 걸었을 것이다. 1960년 답동사거리에 개관한 키네마극장은 현재 하나은행이 들어섰고, 그 앞에 있던 동방극장은 눈꽃마을 상가로 바뀌었다. 그 형태 그대로 대형 술집으로 바뀐 동방극장을 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설도 나돌다가 살인사건이 난 뒤엔 조용히 사라졌다.

키네마극장 그림 ©원용연 작, 김병훈 소장

키네마극장 그림 ©원용연 작, 김병훈 소장

키네마극장 흔적 ©김병훈

키네마극장 흔적 ©김병훈

“야, 오늘 단체관람에 어느 여학교가 오는지 아는 사람? 웅성웅성” 영화 단체관람 시 어느 여학교가 오는지에 관심을 보이던 고등학교 단체관람 극장은 주로 “애관”과 “문화극장”이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기지도 않으면서 여고생들과 함께 한 공간에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들떠 있었던 시절. 그래도 문화극장 뒤편에 있던 퍼모스트 아이스크림 집은 알만한 친구들만이 여학생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던 아지트였다.

쇼도 보고 영화도 보던 극장은 무대가 넓은 자유극장 등이 있었고, 중간중간 영화 상영 전에 당첨권을 나눠주며 옷이며 가전제품을 팔았던 극장이 현대, 한일, 인천극장 등 다수 있었다. 난 그때 당첨되었던 것이(당첨권을 받은 사람은 거의 당첨이었다) 내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 당첨이었다.

1972년 속칭 양키 시장에 오픈한 오성 극장에서도 쇼와 영화를 개관기념으로 성황리에 보았으며 우리나라 최초 대마초 사건이 터진 것이 그 쇼에 출연한 가수들로 시작되어, 통행금지가 있던 시기라 새벽에 보사부에서 덮쳐 인천 대마초 연루자들을 일망타진(?)했고 사회적으로 커다란 쟁점이 되었다. 오픈 초창기에는 로비 어항 시설 등이 새로워 매우 번성했다. 좌석예매 입장이 아니어서 늦으면 입석으로 어렵게 볼 수밖에 없었고 주말에는 더했다.
그때, 나의 작은 기억 하나. 오픈 초기 무슨 영화였는지는 기억도 없고 여자 친구와 영화관에 들어갔더니 주말이라 난감한 상황, 한데 극장에 상주하는 껄렁한(?) 친구들과 안면이 있어 우리를 좌석 맨 뒤 경찰들이 앉는 임검석으로 안내해 주어 여자 친구에게 으쓱거리며 영화를 보았던 일화가 있다.

당시 서울 개봉관에서 영화를 보지 않고 인천으로 오던 연인들이 많았다는 참 설이 있다. 가성비의 차액 등이 데이트 비용을 충당하고도 상대에게 으쓱거릴 수 있음은 덤이라고 했다. 의정부, 동두천으로도 많이 갔지만, 인천만 한 데이트 코스가 없었다고 했다. 어쩜 60년대와 70년 초까지는 자유공원 인근이 우리나라 영화 촬영 장소로 주목을 받았다니 서울과의 접근성으로 알음알음 한몫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인천 현실은 너무 안타깝다. 수도권 관련 학생 수 제약에, 대학에는 예술대학이 거의 없고 예술대 진학생들은 모두 서울로, 졸업 후 활동도 서울로……. 이 접근성은 너무 심각하다.

과거 시에 근무하던 시절, 인천 영화관 영화 상영일 수를 확인하여 문광부에 보고하는 업무를 보았던 적이, 인천 영화관의 흐름을 조금 알아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으로 알려진 애관극장이 표관에서 뉴스극장으로, 협률사로, 축항사로의 변천역사를 가지고 지금도 건재(?)해 있다. 애관의 영화 간판 그리던 분과의 살짝 인연으로 간판 그리는 과정을 보며 대단하다는 찬사를 보내며 나도 ?? 했던 기억도 새롭다.

가설에서 상설로 개관한 문화극장, 그 이후 자유극장, 도원 극장의 1960년도 개관. 인형극장, 부평 대한극장, 1972년 오성 극장, 1975년 주안의 중앙극장 개관의 순으로 볼 때, 사이사이 개관했다 사라진 인천극장, 장안, 현대, 세계, 한일, 도원, 동원 극장(여기까지는 한 번 이상 가 보았다) 등에 이어 동인천, 인하씨네마, 단성사, 주안 극장, 제물포, 국도, 간석, 부평 등의 작은 소극장들이 내 시선 기억에 있었다. 곳곳에 참으로 많은 극장이 있었고, 동시상영 극장에 들어가 에로물과 흘러간 명작들의 영화를 비 내리는 화면으로 보았던 기억들. 추억의 극장으로 남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애쓰는 미림극장이 아직은 남아 있지만, 곧 아파트로 바뀐다고 한다.

애관극장 ©김병훈

애관극장 ©김병훈

미림극장 ©김병훈

미림극장 ©김병훈

이후 1999년 12월 멀티플렉스의 CGV 인천 14가 구월동에 개관하면서 시대 조류에 따라 CGV 극장들이 인천 곳곳의 대규모 상설 매장 등에 우후죽순으로 개관했지만, 현재는 영화산업의 굴곡, 집에서 쉽게 즐기는 OTT 서비스에 밀려가는 상황이 심란하기만 하다. 더구나 돌아보는 내 기억의 영화가, 극장이 어디에 있었고 어쨌고 정도고 그곳에서 보았던 명작이나 007시리즈, 홍콩 르누아르, 서부영화 등의 내용이나 제목들에 관해서는 기억의 망각으로 더욱 심란해진다.

김병훈

김병훈(金秉薰. Kim Byoung Hoon )

’97 [시마을] “가을자리”“여름밤”으로 신인 당선
토끼와 포수, 꽃피는 체리, 햄릿모노드라마 등 100여 편 연출
사자가 물고 간 꽃신, 맹꽁이 장가가는 날 외 20여 편의 소리극 창작
아동뮤지컬 30여 편 창작 및 각색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