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자타공인 미추홀 문화지킴이
학산문화원 정형서 원장을 만나다
유사랑
학력: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경력
· 1993 ~ 현재 새안의원 원장
· 1999 ~ 2000 인천구치소 의무과장 역임
· 2005 ~ 2008 인천시 의사회 대외협력이사
· 2018 ~ 현재 우리소리(판소리보존회)이사
· 2018 ~ 현재 술빚는 사람들(전통주연구소) 대표
· 2005 ~ 현재 함께하는 길벗회 이사
· 2020 ~ 2024 제6대 미추홀학산문화원 원장
· 2024 ~ 현재 제7대 미추홀학산문화원 원장
미추홀학산문화원은 2003년 9월 창립총회를 거쳐 출범한 뒤, 올해로 만 21주년을 맞는 동안 구민들의 문화갈증을 해소하고, 지역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내는 구심점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런 미추홀학산문화원을, 지난 2020년 3월, 제6대 원장으로 당선돼 이끌고 있는 정형서 원장(65)을 만났다. 정 원장은 올해 3월부터 다시 제7대 원장으로 연임되어 새로운 임기를 시작한다. 정 원장은 인천에서 30년째 ‘새안의원’을 운영해 오고 있는 외과 의사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지역문화지킴이로 인정받고 있다.
미추홀학산문화원 20주년 기념식
“우리 미추홀학산문화원이 중점적으로 지속해오고 있는 사업은 크게 4가지예요. 미추홀의 지역학사업과 고유의 지역축제진행, 그리고 우리고장의 국가유산활용사업과 문화기반시설 네트워크구축 및 위탁운영이죠. 지난해까지 10주년을 맞이해 우리 미추홀 고유의 마을축제로 뿌리내린 ‘학산마당극놀래’는 올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전환을 모색 중이고, 올해로 7회째가 되는 ‘인천원도사제’는 조선시대 원도에 설치된 원도사라는 사당에서 왕을 대신해 인천의 지방관이 여러 섬의 신주를 모아 봄, 가을로 지냈던 제사를 재현하는 행사예요. 우리 미추홀구에서는 낙섬으로 불리던 ‘원도(猿島)’를 현재 용정5동 근린공원 일대로 추정하고, 그곳에 원도사터 표지석을 설치해 원도사제를 드리고 있어요. 또 다른 형태의 축제라 할 수 있죠. 식전 행사로 수령행차와 소망의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전폐례, 독축(讀祝), 작헌례, 철변두, 음복수조례(飮福受胙禮), 망예례 순서로 진행돼요. 원도사제는 어쩌면 조선시대 훨씬 이전인 고대로부터 이어 온 국가제의일 가능성이 커요. 동지를 넘긴 3번째 미일(未日)인 납일(臘日)에 문학산에서 해가 떠오르는 시간에 맞춰 납제를 진행했을 거로 추측하고 있죠. 올 4월 학술제를 통해서 원도사제 기원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를 진행해볼 계획이에요.”
제6회 인천원도사제
사실 정형서 원장은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문화원장이 할 일은 뒤에서 힘을 실어주는 역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허허허 웃는 넉넉한 인품에 누구에게나 살갑게 대하는 정 원장이 의대 재학시절 계엄령9호 위반으로 3년 형을 선고받고 2년을 복역한 운동권 출신이라는 사실을, 인천의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 바람에 사사건건 여러 제약도 받았고, 졸업도 동기들보다 늦어져 의사면허도 4년이나 밀릴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복권도 되고, 광주민주화운동유공자로 보상은 받았다지만, 여전히 편견을 가지고 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니, 어찌 마음속 회한까지 없을 수 있으랴? 그래도 그 시절 자신의 선택에 미련이나 후회 같은 건 없단다.
“고향은 서울이에요. 퇴계로 쪽에 있는 동북초등학교와 장충중학교, 보성고등학교를 거쳐 경희대 의대를 졸업했어요. 78학번이죠.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쳐 인천과 인연을 맺고 인천사람으로 살게 된 건, 첫 직장이자 올해까지 30년째 운영해오고 있는 ‘새안의원’ 때문이에요. 하지만 의과대학 동기로 인천에서 가정의학과 의사를 하고 있는, 용유도출신 아내의 영향도 한몫했죠. 제가 처음 문화와 예술 쪽에 아슴푸레 눈을 뜨게 된 건,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 덕분이에요. 미술 시간에 등대와 파도를 유화물감으로 덕지덕지 묘사한, 어떤 화가의 작품에 대한 제 감상문을 보시고는, 무한칭찬과 함께 ‘그림은 잘 즐길 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쳐 주신 분이죠. 대학입시에 목맨 다른 아이들이 미술 시간마저 아까워 불평일 때도, 저는 인상파부터 미술사조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오히려 가슴이 뛰었어요. 대학 때 YH 여공들을 대상으로 면목동에서 야학교사를 했는데, 제가 영어와 함께 미술 과목을 부러 담당한 이유도 그런 기억 때문이었죠. 군부 쿠데타 세력들의 야만적 폭거를 고발하는 데모를 하고 학내유인물을 만들어 돌리다, 사복형사에게 체포되어 의과생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수감된 뒤 출소해서는, 외대 선배가 만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연구소’의 일을 도와주며 대한민국의 사회와 문화현상을 꼼꼼하게 톺아보는 기회를 얻기도 했어요. 해방 후부터 1948년까지 노동, 정치, 농민 등을 망라해 분야별 신문자료를 스크랩하는 일이었는데, 나중에 ‘해방 후 공간’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죠.”
<미추홀, 인천의 입맛을 찾다> 출판기념회
그랬던 정형서 원장이 미추홀학산문화원을 맡게 된 건, 당시 박우섭 청장의 권면과 미추홀구민들의 문화예술 향유기회를 넓혀주고 싶다는 단순한 열망 때문이었단다. 수준 높은 양질의 다양한 문화공연을 제공해 삶의 질을 개선하고, 생활고에 지친 사람들에게 따뜻한 정서적 위로와 해방감을 줄 신바람문화축제를 개발할 뿐 아니라, 미추홀구가 품고 있는 다양한 역사적, 지역적 문화유산의 발굴과 유지, 발전에 대한 열정이, 그의 등을 떠밀었던 것이다.
“미추홀학산문화원장으로서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야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많죠. 그래도 그중 하나만 손에 꼽자면, 고증에 입각한 문학산성의 제대로 된 복원이에요. 제가 ‘인천의제21’의 문학산분과위원장을 맡았을 때, 문학산 정상의 우물터에 관한 이야기와 자료를 보고 들은 적이 있어요. 예전 산성에 기거하는 군사들 때문에라도 우물은 필수였거든요. 문학산 군부대에서 퇴역한 어느 하사관의 증언에도, 정상 평탄 작업과 군사시설을 지을 때 우물을 메운 적이 있다고 해요. 계양산성박물관이 국립박물관 자격을 갖게 된 것도 계양산성 우물터에서 발견된 목간 때문이잖아요? 문학산 우물터에서도 그런 자료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죠. 한때 인하대 연구팀이 우물터 찾는 작업을 하다가 결국 흐지부지됐는데, 그거 확인해 보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일까 저는 늘 아쉬워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인생의 좌우명처럼 간직하고 산다는 정형서 원장의 미추홀과 학산문화원에 대한 애정은, 인터뷰 내내 그의 반짝이는 눈빛에서 분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의사로서 인천시민들의 건강에 평생 헌신해온 그가 인천과 미추홀구의 문화건강에도 의미 있는 기여를 하리라 확신한다.
인터뷰 진행/글 유사랑(劉思狼, yusarang)
시사만평가, 커피화가,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