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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을 깔아주면 잘 노는 아이들
인천교육청 ‘읽.걷.쓰’ 프로그램
이동구
청소년 대상 글쓰기 프로그램 중 작년부터 인천교육청에서 추진하고 있는 <읽․걷․쓰> 프로그램은 주목할 만한 여러 성과를 조금씩 끌어내고 있다. <책 읽는 도시, 인천> 사업에 ‘쓰기’와 ‘걷기’를 넣어 확장한 이 사업은 읽기로 지혜와 지식을 기르고, 걷기로 나만의 생각을 가져보고, 걸으면서 생각한 것을 글로 써 보자는 것이다. 겹받침과 된소리가 이어지는 ‘읽걷쓰’라는 어색한 이름만큼 처음에는 친숙해지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읽고, 걷고, 쓴다’라는 직관적인 네이밍을 통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쉽게 이해되는 측면도 있었다.
읽․걷․쓰 관련 각종 프로그램 포스터 (출처: 인천교육청 공식 블로그)
책 읽기와 글쓰기의 유용함에 대해 이 지면에 굳이 나열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중요한 것은 교육청 차원에서 초중고 학생을 비롯해 교사와 학부모,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이 프로그램이 광범위하고 진지하게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도서관 한 책 캠페인, 작가와 함께 글쓰기&책 쓰기, 서평 공모전, 책동네 산책 프로젝트, 매일 쓰기 100일 도전 프로젝트, 토론회, 독서한마당, 독서 캠프, 동아리 운영, 독서 아카데미, 챌린지, 글바시(‘글로 삶을 바꾸는 시간! 글로 세상을 바꾸는 시민’의 줄임말), 생명사랑 밤길 걷기 등 다양한 방식과 경로로 이 사업이 진행되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뿐만 아니라 대입을 준비하는 일반고 수업 현장에서도 이를 활용한 수업 사례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다. 내가 몸담은 학교에서도 동료 교사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활동을 이어가고 결과물들을 뽑아내는 것을 보면서, 무엇이든 판을 깔아주면 학생들은 역시 잘 해낸다는 생각과 함께 기대 이상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학생들의 왕성한 활동 내용과 결과물에 감탄하게 되었다.
세계를 보듬는 영어동화 창작 프로그램 활동 (출처: 광성고 홈페이지)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2023 세계를 보듬는 영어동화책 만들기였다. 보통 여러 학교에서 ‘영자신문’이라는 동아리를 통해 영어로 된 기사를 기획하고 신문을 발행하는 것은 보아 왔지만, 학생들이 동화의 내용을 영어로 직접 창작하여 개발도상국 아이들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책을 발간하는 것은 처음 들어보았다. 긴 시간을 들여야 하는 만큼 입시를 앞둔 일반고 학생들이 쉽게 실천하기에 어려워 보였고, 편견이겠지만 남학생들이 동화책을, 그것도 영어로 창작하여 발간한다는 것은 조금은 모험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작년 연말에 그 프로그램을 지도했던 영어 교사의 결과 발표를 지켜보며, 역시 학생들은 판을 깔아주면 얼마든지 의미 있는 결과들을 끌어낸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쓰기 중심 독서교육 it 프로젝트 활동 (출처: 광성고 홈페이지)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해 주는 ‘질적 성장’에 교육의 본질이 있다면, 성장을 위해 가장 일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책 읽기이다. 그런 점에서 독서와 더불어 자기 생각을 글로 쓰고 이를 공유하는 것은 학교 현장에서 매우 의미 있는 교육활동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생각보다 단지 그런 ‘판’을 깔아주는 것만으로, 한번 해 봐, 하고 무심코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기대 이상의 결과들을 만들어 낸다. 처음엔 시큰둥하지만, 동기를 부여하고 룰을 만들어 주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은 어떤 프로그램 하나가 ‘판’ 안에서 꿈틀꿈틀 시작된다. 그러다 막상 톱니바퀴가 물려 돌기 시작하면 어느덧 기대 이상의 추진력을 갖고 무언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뿜어 나오는 학생들의 창의력, 열기, 에너지는 참으로 대단하다. 비단 영어동화책 만들기뿐만 아니라 수업과 접목하여 시도해보는 다양한 프로젝트들은 학생들을 움직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만들게 하며 수업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코로나 이전 2학년 문학 시간에 한번은 배웠던 작품 중 무엇이든 자유롭게 골라서 인상적인 장면을 다른 매체로 표현해 보라는 과제를 제시한 적이 있다. 무엇이 얼마만큼 나올지 예측하기 어려웠고 다양한 학업 역량과 학습 성향을 지닌 학생들을 모둠 단위로 배정하였기 때문에 일부 학생들의 주도로 흘러가지 않을까 염려도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이 고루 참여하여 수업 시간에 발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창의적이고 병맛 가득한, 그리고 여러 밈들을 적절히 결합하여 재미있으면서도 작품의 핵심을 잘 표현한 발표물을 보면서 이들이 내가 알던 학생들이 맞던가, 내심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때 새삼 느꼈던 것은, 그들은 우리 교사들의 생각 이상으로 뭐든 판을 깔아주면 잘 해낸다는 것이다. 교사가 주도하는 비중을 줄이고 학생들에게 그 판에서 놀게 하면 일방적인 강의를 하는 것보다 수업의 내용이 훨씬 풍성해지고 배움의 질적 수준이 높아짐을 경험하게 된다. 한번 그 맛을 보면 수업 설계의 번거로움과 결과물의 공정한 채점 과정이라는 귀찮음도 충분히 상쇄할 만큼의 만족감을 얻게 된다. 그래서인지 수업하랴, 공문 처리하랴 바쁜 일상 중에서도 교사들은 교육청에서 날아오는 여러 공문을 기웃거리며, 뭔가 해볼 만한 것들이 있는지 찾고, 기꺼이 판을 짜서 학생들과 함께 놀아보려고 한다. 계획서를 내고 활동 수행에 필요한 사업비를 받아, 학생들을 모집해서 여러 새로운 시도를 함께해 보게 된다. 바쁘면서도 한편으로 즐겁게 놀아보는, 새로운 형태의 수업이 시작되는 과정이다.
삶을 가꾸는 읽걷쓰 ‘가족 독서캠프’
(출처: 유튜브 [읽걷쓰 프로젝트 우수 활동(수업)] 캡처)
학생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 코로나를 겪으며 친구들과 교육과정 내에서 ‘책’을 놓고 함께해 보는 경험은 더욱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읽고’ ‘걷고’ ‘쓰는’ 판이 벌어진 것이 반갑다. 교실 내 수업뿐만 아니라 교실을 벗어나 여러 기관과 연계한 활동들로 이어지는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학생들이 독서 습관을 형성하고 독서 경험을 확대하며 이를 공유하고, 수업 또는 생활 중 글을 써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이는 가장 본질적인 교육에 더 닿아 있는 활동일 것이다. 단순한 브랜딩 사업에 불과하다는 일각의 우려도 있지만, 참여자들의 소감과 과정을 담은 기록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더 다양하게 더 재미있게 놀아볼 수 있는 판이 열렸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AI와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글쓰기 프로그램은 학생들의 교육에 더욱 다채로운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글쓰기 교육을 통해 최종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그 과정에서 참여자가 의미를 부여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 어떤 방식이든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질적인 성장을 이루어내며 성숙해지는 학생들을 지켜보는 것은 교사로서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이미지 제공: 이동구
글 이동구(李東玖, Lee Dong gu)
광성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