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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문화예술 교육, 어때야 할까?
고두한
입시 지옥이라는 한국의 학교 교육에서 문화예술은 어떤 위치일까? 흔히 학교에서 이뤄지는 문화예술이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이 학교 축제다. 미술 작품을 위주로 전시된 작품을 관람하거나 체험하는 것을 시작으로 오후에는 노래와 댄스 위주의 공연으로 축제는 마무리된다. 형형색색의 조명과 함께 현란한 아이들의 무대는 2~3시간 동안 이뤄진다. 문화예술 활동이 중심이 되는 날은 일 년 열두 달 중 딱 하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 방해되지 않도록 교육과정의 뒷골목으로 지나가야 한다. 학교에서 문화예술은 아직도 변두리일 뿐이다. 축제 업무는 기피 업무 중의 하나다. 공부하느라 힘들었던 아이들에게 하루 놀게 해주는 날로 취급한다. 담당 업무를 맡은 교사가 기획한 그 바탕 위에서만 자신들의 끼와 열정을 발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모습과도 거리가 멀다. 축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학교에서 문화예술은 계륵이라는 점이다. 문화예술이 학교에서만 이런 취급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도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문화예술’은 근면하지 못한 ‘베짱이’의 영역일 것이다.
어느 나라였던가. 학교 건물의 중심에 도서관이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광장을 중심으로 교실이 배치되었던 모습에서도 마찬가지. 평생 학교의 가장 좋은 자리에 교장실이라든가 교무실이 있던 모습만 보아왔던 한국 사람의 눈에는 너무나 낯선 공간 배치였다. 마찬가지로 더 이상 문화예술이 학교의 구색이나 맞추는 형태의 변두리가 아니라 교육과정의 중심에 문화예술이 자리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고민과 실천이 조금씩 쌓여가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어른들이 아이들을 바라보고, 문화예술을 바라보는 시각부터 달라져야 한다.
선학중 학생 공동 제작 축제 현수막
예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 축제의 현수막을 아이들이 직접 만들었다.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어른에 의해 세련되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손으로 직접 문화예술의 싹을 틔워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문화예술은 떠먹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고 그 결과를 공유하는 자리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학교를 서비스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자본주의적 시각과 함께 어린애들이 하는 것은 어설프다는 문화가 강한 분위기 때문에 문화예술은 아이들로부터 분리된다. 현수막 제작부터 아이들에게 맡긴다는 것은 문화예술의 주체는 아이들임을 선언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설령 아이들이 부족하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어른들은 기억해야 한다.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느끼는 것이지만 성적이라는 결과 중심의 학교 교육 속에서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열등감에 시달리게 되고 자기 비하로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학교의 교육과정에 다양한 예체능 활동을 배치하여, 이를 통해 아이들이 자존감을 회복하기를 바라면서 교육과정을 준비하였던 적이 있다. 음악 시간의 일부를 할애하여 모든 아이가 바이올린을 배우게 하고, 일주일에 한 시간씩 체육 시간에 외발자전거를 타도록 하였다. 교육심리학자 중에 비고츠키라는 분의 근접발달영역이라는 아동 인지 발달 이론이라는 게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아이들은 혼자 배울 때보다 함께 배울 때 더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게 된다는 것인데, 한 학기 만에 아이들은 꽤 수준 높은 기량을 보여주었다. 외발자전거를 타고 직진하는 것은 물론 회전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바이올린 활을 처음 잡는 아이들이 캐럴이나 동요를 연주하게 되었다. 학기 말에 모든 아이가 외발자전거나 바이올린 연주 발표회를 하였는데, 아이들의 발표회를 보면서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을 친구들과 함께하고, 그 결과를 같이 공유하는 것이 축제의 진정한 의미가 아닌지 되새겨 보게 되었다. 문화예술이 학교 교육과정의 중심에 들어온다는 것이 결국 이런 것이 아닌지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선학중학교 교육과정 발표회
그런데 문화예술이 학교 교육과정의 중심으로 들어오려면 수업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아이들이 책을 읽었다면 이것을 어떻게 예술과 접목하여 표현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수업의 변화에 포함되어야 한다. 책을 읽고 평가용 감상문을 제출하는 것으로 수업은 변하지도 않고, 문화예술은 학교에서 겉돌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역사 수업 시간에 배운 근현대사의 인물과 사건에 대해 국어 시간에 대본을 쓰고 뮤지컬로 발표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의 입을 통해 위안부의 고통이 그려졌고, 4·19 혁명에서 희생되신 분들의 함성이 되살아났다. 근현대사의 고통스럽고 숙연한 순간들이 아이들에게 내면화되어 오늘 이 자리에 형상화되었다.
선학중학교 역사 뮤지컬 발표회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던 것은 문화예술 교육은 학교 교육과정 속에서 구현될 때 더욱 빛이 나고 깊어진다는 점이었다. 역사와 사회, 현실과 벽을 쌓은 채 이뤄지는 문화예술이어서는 안 된다. 상업주의적인 것이 문화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현실에 대해 학교는 대응할 수 있는 문화예술 교육의 체계를 고민해야 한다.
그 고민의 방향은 통합의 방향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문화예술 교육활동이 따로 있고, 수업 활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교과 수업과 문화예술 활동이 서로의 본질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하나로 통합되는 방식을 고민해 나가야 한다. 수업의 결과로서 축제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시 축제를 통해 수업의 내용이 더 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예술이 우리 아이들의 자존감을 살려주고, 청소년기의 열정을 불사르게 해주는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아이들이 준비한 역사 뮤지컬을 보면서 세대와 세대가 이어지고 통합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우리 사회가 살려야 할 언어가 아이들의 입에서 새롭게 다시 살아나오는 것을 보면서 공동체로서 하나 됨을 느낀 것은 어른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로 공동체는 더욱 파괴되었고, 개인주의는 더욱 심화하였다. 코로나에 대한 공포가 극심할 때는 학교에서조차 아이들과 아이들 사이에 벽을 세우고 말을 할 수 없게 하였다. 그 결과 학교는 코로나 이전보다 더욱 가혹한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 각종 갈등과 분쟁이 학교 내에서 조정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고, 교육과정은 더욱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문화예술 교육은 황폐해진 공동체 통합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러하기에 학교 교육과정의 중심에서 문화예술 교육을 고민하는 노력은 더욱 소중하다.
이미지 제공: 고두한
글 고두한 (高斗漢, Go Du-Han)
현재 신흥중학교 교장이며, 교사극단 ‘나무를심는사람들’ 회원으로, 학교 연극 활동을 바탕으로 『연극으로 놀며 배우며』(공저)라는 연극 실천 사례를 발간하였으며 최근에는 『다시 혁신학교』(공저)라는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