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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탐구

이상실 소설집『죽음의 시』 (삶창, 2023)

양재훈

『죽음의 시』는 인천에서 꾸준히 활동해온 소설가 이상실의 신간 소설집이다. 늘 그래왔듯 이번 소설집에도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집요한 탐구와 문제 제기가 담겨 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은 불안한 노동 현실과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상처, 사회적 책임이 분명한 죽음 등이다. 이상실은 현재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사회가 빚어낸 문제들이자 구성원 각각의 관심과 반성을 요구하는 문제들에 개입하고자 한다. 이는 이상실이 자신의 소설을 통해 늘 취해 왔던 태도이거니와 그것이 바로 그가 생각하는 문학과 예술의 사명인 듯하다.

이상실 소설집 『죽음의 시』

이상실 소설집 『죽음의 시』

8편의 작품 하나하나에서 그러한 작가적 소명에 이끌린 글쓰기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아니, 그것을 읽을 수밖에 없다. 미래에 대한 불안의 증폭에 힘입어 각자도생의 이데올로기가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는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이처럼 집요하게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환기하는 작가의 존재는 참으로 소중하다. 이러한 그의 작가적 고집이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바란다.

때로는 과도한 작가적 자의식 때문에 소재에 함몰되거나 현실에 대한 시각이 너무 단순화되는 측면도 있다. 단조로운 선악구도 위에서 축조된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복잡한 관계들과 그에 따른 마음의 심층적 구성 등을 찬찬히 헤아리는 머뭇거림이 다소 아쉽다. 작가가 의도한 작품의 주제를 등장인물이 직접 말하는 경우가 잦다는 것도 소설의 긴장감을 이완시키는 요인이다. 특히 작가 자신의 사회·정치적 의견으로 보이는 것을 직접 말하는 이른바 ‘메가폰적 인물’들이 독자 스스로 현실을 돌아볼 기회를 감쇄할 것 같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 고통의 문제들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글쓰기가 그의 소설에서 눈을 돌릴 수 없게 한다.

작가의 집요한 예술적 자의식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과 단순화된 소설적 구도에 따른 아쉬움 사이에서 이 책을 읽었다. 한데 그것이 뜻밖에 기묘한 독서 체험을 만들어 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은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일종의 알레고리로 읽어 봄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이 책을 리얼리즘에 대한 고집스러운 천착으로만 읽을 때는 놓쳤던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작가 자신의 의도는 리얼리즘의 충실한 수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기묘한 독서 체험은 작가의 명시적 의도를 벗어난 텍스트 자체의 수행성이 만들어 낸 효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특히 표제작인 「죽음의 시」와 관련되어 있다.

「죽음의 시」는 물류센터 노동자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 한국 사회의 불안한 노동 현실과 노동자에 대한 부조리하고 부당한 대우를 고발한 작품이다. 대학생인 주인공 종기는 물류센터에 나가 물류를 분류하는 일을 하고 있다. 관리사원인 마우스 오는 구체적인 작업 환경을 무시한 채 UPH(시간당 피킹)의 숫자로만 노동자를 평가한다. 그는 날마다 수차례씩 UPH가 저조한 사원을 호출해 면박을 주고, 그에 대한 합리적이고 정당한 항의들을 묵살하며 줄기차게 UPH의 숫자만을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비정한 노동환경 속에서 종기와 함께 일하는 노동자이자 물류센터의 노동 조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자였던 구윤재가 죽음에 이른다. 이를 통해 작품은 노동자를 인간이 아닌 기계 부품처럼 취급하는 비정한 노동 현실을 보여준다.

현재의 편리한 소비 환경 이면에 있는 잔인한 노동 조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징적인 공간인 물류센터를 포착한 것은 제재 선택에 관한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러나 초점이 물류센터라는 공간에 한정되어 있어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제시가 부재한다는 점, 자칫 소설의 구도가 절대악으로서의 마우스 오와 열악한 노동환경에 저항하는 영웅적 노동자 사이의 대립 구도로 단순하게 파악되기 쉽다는 점 등은 한계로 남는다. 구윤재가 사용하는 언어는 자신의 삶에 대한 생생한 일상어가 아니라 관찰자의 시선을 취하는 TV 토론 패널의 언어 같다. 그가 종기에게 보여주는 동료 노동자의 시 역시 현재의 언어와는 거리가 있는 1980년대의 민중시를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다소간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요인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현실에 대한 그와 같은 소설적 단편화가 바로 이 소설의 독특한 효과를 낳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마우스 오라는 인물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노동자들을 기계 부품으로 취급하는 중간 관리자다. 그런데 모든 것을 UPH의 숫자로 평가하는 그의 언어는 그 자신이야말로 가장 기계 부품에 가까운 존재임을 드러낸다. 기묘한 효과는 그의 행동이 회사의 이윤 증대와 무관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저해하기 쉽다고 의심된다는 점에 있다. 사원 평가 방식에 대한 종기 등의 합리적인 문제 제기나 노동자의 휴식 시간 확보 등은 실상 노동의 효율성 제고라는 회사의 노동 관리를 조금도 저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행해진다. 그런데 마우스 오는 그것을 철저히 묵살함으로써 오히려 노동의 효율성을 저해하며 노동자를 괴롭히고 있을 뿐인 것처럼 보인다. 이는 그가 오직 ‘UPH가 저조한 사원을 파악하고 호출해 그 사실을 지적한다’는 매우 단순한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하는 기계임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그는 아직 알파 테스트조차 거치지 않은 시제품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미완의 기계 부품처럼 행동하는 마우스 오와 달리, 그에게 기계처럼 취급되며 관리되는 사원인 종기와 윤재는 오히려 끝까지 자신의 인간성을 지켜 내고 있다. 부당한 노동에 저항하고 동료의 죽음에 분노하며 시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이들을 기계로 전락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그들의 인간적 존엄을 침범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듯하다.

세상은 점점 노동하는 인간을 기계 부품으로 취급하고 소비하는 인간을 데이터의 묶음으로 파악하며 모든 것을 자본의 증대라는 목적에 종속시키려는 도착적인 형태를 강화해 가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힘이 아무리 강력하게 작용하더라도 우리는 끝내 인간일 것이다. 이것이 노동자를 기계로 취급하는 관리자와 기계로 취급되는 노동자가 각각 가장 선명한 기계와 인간으로 역전되는 상황을 그림으로써 「죽음의 시」가 알려준 교훈이다.

글 양재훈

2014년『경향신문』신춘문예 평론 당선, 대표평론 「새해가 오게 하려면」, 「불/가능한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