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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린 벽의 파급 효과

<언더시티 프로젝트: 부평에 그래피티 벽을 허하라>

현예진

도시의 팔레트는 회색이 두드러진다. 투박한 질감의 아스팔트, 빼곡히 늘어선 빌딩, 불균질한 땅을 매끄럽게 매립한 시멘트. 심지어 사람들의 옷차림 마저 무채색 향연에 합류한다. 채도가 소거된 도시는 어딘가 고요하고, 서늘한 분위기가 부각된다. 필자의 어린 시절 기억 속 부평 역시 회색 도시의 전형이었다. 버스 안에서 마주하는 바깥 풍경과 동네 골목을 쏘다니며 바라봤던 건물의 뒤통수들. 하나 특별한 것 없는 잔상이다. 당시 내게 부평을 설명해 보라 했다면, 지하상가로 대표되는 번화가라 일축했을 것이다. 그만큼 감지할 수 있는 도시의 색이 없었다는 점은 오랜 아쉬움으로 남았다. 다만, 부평에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캐릭터가 있었다. 역동적이고, 재기발랄하면서도 조금은 부산스러운 모습. 부평에서의 기억이 중첩되며 만들어진 하나의 상이었다. 그 영향의 원인을 추측해 보면 부평역 광장을 누비던 스케이트 보더들과 로데오 거리의 비보잉하던 이들이 있다. 문화는 간접 향유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도시의 긍정적인 면모를 부각시킨다.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궤적이 밋밋했던 회색 도시를 밝게 물들이는 그래피티처럼.

브루클린 도심에 새겨진 그래피티 ©️Unsplash

브루클린 도심에 새겨진 그래피티 ©️Unsplash

도시의 뒷골목이 유독 차갑고 건조하게 보이는 것은 사람의 자취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거리 곳곳에서 존재의 증명을 마주할 수 있다면 아마 도시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이때 그래피티는 도시에 생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리스본은 그래피티를 활용해 낙후한 도심을 부흥시키는 데에 성공한 도시 중 하나다. 바이로 알토(Bairro Alto)와 알파마 지구(Alfama) 같은 구도심에 그래피티 프로젝트를 진행함으로써, 이미지를 혁신하고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예술가들은 폐허처럼 방치된 골목과 낡은 벽면을 예술작품으로 변화시켰고, 그 덕에 인적이 드문 지역마저 관광 명소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제는 거리 예술 공식 사무소가 별도로 존재할 만큼, 그래피티로 장식된 도시를 걷는 도보 여행을 장려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멜버른은 스트리트 아트 작가들을 선별해 지정된 곳에서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유명하다. 멜버른이 문화예술의 도시로 인정받을 수 있던 기반에 그래피티가 있다고 판단한 결과다.

앞서 많은 도시가 증명했듯, 그래피티의 이점은 자명하다. 삭막한 도시의 풍경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시민들에게 문턱 없는 예술을 제공한다. 필자가 자란 동네도 여기저기 흠집을 머금은 건물 외관이 그대로 방치되지 않고, 색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도시를 이룬 회색 건물들이 유령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닌, 생동하는 마을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부평에 그래피티를 위한 벽이 생겨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기쁨이 앞섰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국의 ‘고담 시티’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나 지역의 정체성을 다채로운 컬러로 나타낼 수 있는 기회였다. 부평이 오랜 시간 서브컬처와 긴밀한 관계성을 이어오던 지역이라는 점과 서브컬처의 근간에는 그래피티가 있다는 사실도 의미를 배가시켰다. 해당 프로젝트는 인천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래피티 크루 ‘LAC 그래피티 스튜디오’와 이뤄졌다. 본격적인 작업은 공모를 통해 시설물을 선정, 건물 외벽에 장소성을 반영한 그래피티 아트 작업이 이뤄지는 순서였다. 심사 결과, 삼산체육관 부근에 위치한 부평구청소년수련관과 부평삼거리 앞 정석빌딩 두 곳이 선정됐다. 두 곳 모두 시민들의 시선이 잘 닿는 위치라 그래피티로 인한 분위기 반전이 극적일 장소였다.

청소년수련관 외관에 새겨진 그래피티 ©️부평구문화재단
청소년수련관 외관에 새겨진 그래피티 ©️부평구문화재단

청소년수련관 외관에 새겨진 그래피티 ©️부평구문화재단

삼산분수공원 X-게임장 기물 ©️부평구문화재단
삼산분수공원 X-게임장 기물 ©️부평구문화재단

삼산분수공원 X-게임장 기물 ©️부평구문화재단

먼저 청소년수련관 외관에는 경쾌한 인상의 타이포와 ‘Never Mind Bear’ 캐릭터가 새겨졌다. 해당 그래픽은 아티스트가 청소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담겼다. 의무나 책임으로 인한 행동이 아니라, 하고 싶은 걸 해도 괜찮다는 응원의 말이다. 지역성 역시 놓치지 않았다. 작품의 중심이 되는 캐릭터는 헤드셋을 착용하고 있는데, 이는 대중음악을 유입시켰던 부평의 음악 역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청소년수련관 뒤편 삼산분수공원 X-게임장 기물에도 그래피티 작품이 덧입혀졌다. 이는 공모에 앞서 부평구청과 협업해 시범 작업으로 선보인 것으로, 스케이트 스폿과 그래피티의 조합이라 더 유의미하다.

부평삼거리 정석빌딩에 새겨진 그래피티 ©️부평구문화재단

부평삼거리 정석빌딩에 새겨진 그래피티 ©️부평구문화재단

이번 공모 선정 시설물 중 단연 눈에 띄는 작업은 부평삼거리 정석빌딩이다. 빌딩 벽면을 크게 채운 인물은 다름 아닌 백범 김구 선생. 헤드셋을 착용한 백범 김구 선생의 초상과 ‘문화의 힘’이라는 글자가 도시를 환하게 비추는 듯하다. 해당 작품의 모티프가 된 것은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는 백범 김구 선생의 메시지다. 그저 지나쳤을 빌딩의 벽면이 캔버스로 변하자, 도시의 풍경과 시민들의 얼굴에도 변화가 생긴다. 발끝을 바라보며 걷던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같은 곳을 바라보고, 그 의미를 헤아린다. ‘벽에 그린 낙서’가 시민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하나의 창구가 된 것이다.

런던 달스턴 그래피티 ©️Unsplash

런던 달스턴 그래피티 ©️Unsplash

예술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묻는다면, 부평의 그래피티를 말하겠다. 어쩌면 대단한 공공예술보다 건물 외관을 달리 구성하는 일이 더 빠른 변화를 가져다줄 지도 모른다. 길모퉁이에서 건물의 벽면을 훑어보며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끼던 아이에게 그것보다 거대한 이상을 심어줄 수 있으니까.

현예진

현예진 (Yejin Hyun)

문화예술 커뮤니티 플랫폼 ANTIEGG 콘텐츠 디렉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서비스에 마음을 쏟아 왔습니다. 프리랜서 콘텐츠 기획자로 활동, 텍스트 기반 콘텐츠를 통해 독자와의 접점을 넓히고 있습니다.
vousyej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