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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연기를 멈추지 않으면 생기는 일

연극 <배우우배>

엄현희

연기는 쾌감이 있는 행위이다. 잠시나마 타인이 되어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며, 사람은 이를 본능적으로 즐거워한다. 어린 시절 엄마 아빠가 되어 노는 소꿉놀이는 아마 누구나 해 봤을 것이다. 2023년 연말 인천 신포아트홀에서 공연된 <배우우배>(이강백 작/송용일 연출)는 이러한 심리에 대한 극이다. 연극배우 우배는 공연에서 배역에 너무 몰입하는 습관이 있는 배우다. 공연은 연기를 좋아하는 우배가 그 즐거움에 지나치게 탐닉하며 겪게 되는 사건을 보여준다.

포스터

<배우우배> 포스터

연기를 즐기는 우배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즉 현실로 되돌아오는 순간이다. 우배는 현실에서도 계속 배우일 수 없는지, 연기를 멈추지 않을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그때 우연히 만난 사기꾼이 접근한다. 오래전 실종된 누군가인 척하는 거짓말을 해보지 않겠냐 말이다. 현실에서도 연기를 계속할 수 있는 길이라며 달콤하게 유혹한다.

우배와 사기꾼 제갈조 관계는 마치 고전 파우스트 박사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떠올리게 한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 유혹대로 영혼을 걸고 쾌락에 탐닉하게 된다. 하지만 파우스트 방황이 단지 타락이 아닌 것은 그가 쾌락에 대해 사색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우배도 마찬가지다. 그는 제갈조 제안을 받아들여 실종자 가족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데, 그 과정 전부는 연기에 대한 갈망과 사색으로 밀고 간 것이다.

우배와 제갈조 캐릭터 표현은 위 이야기를 뒷받침하듯이 만들어졌다. <배우우배> 많은 장면은 두 배우가 끌어가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 균형감과 함께 있을 때 특유 에너지는 중요해 보인다. 우배는 고민하고 진지하며 고뇌하는 모습이 많이 그려졌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캐릭터다. 반대로 제갈조는 희극적이며 가벼운 톤의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캐릭터 설정과 방향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다만 설정이 초반에 이어 장면이 진행되어도 크게 변화가 없는 점이 아쉬웠다. 장면 안에서 좀 더 변화를 주거나 혹은 장면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이 보강되었으면 어땠을까.

공연 사진

<배우우배> 공연 사진

공연이 이뤄진 신포아트홀은 소극장으로 가로 기다란 직사각형 무대를 보여줬다. 천장이 낮고 깊이가 얕아 이미지를 만드는데 수월하지 않다. 다만 배우들 소리는 객석과 무대가 가까워 전달이 잘 되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공간 조건은 <배우우배>에 불리해 보였다. 극은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이 뒤섞인 우화적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강백 극작가의 지속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사실적인 공간들은 몇 가지 소도구 등으로 환경을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지만, 우화적 공간은 일반적으로 큰 장치 등 무대미술적 요소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장면 전환이 쉽지 않고 암전을 지나치게 사용하는 것은 호흡이 끊어지기 때문에 피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화적 극 세상을 표현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공연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보여준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우화적 공간을 실종자 가족 집으로 한정시켰다는 것이다. 그곳은 친일파 자손 집으로 많은 금전을 모아 굉장한 부잣집이다. 우배는 이곳에 실종자 즉 잃어버린 손자인 척 연기하며 가족 앞에서 하나씩 시험을 통과하고 가족들을 속이게 된다.

공간은 곳곳에 황금으로 만든 듯한 지붕 장식과 그림 장식들로 비현실적이다. 무대미술도 커다란 변형을 가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적이지 않은 접근을 보여준다. 그 공간에 사는 어머니는 자식을 잃어버려 장기가 다 녹은 비참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비현실적 설정과 더불어 피가 밴 붕대로 감긴 환자다. 그 외 이 공간에서 만난 이모와 간호사 사장 등도 과장돼 있으며, 희화화된 캐릭터 표현을 주로 보여준다. 이 공간은 사실일까, 진짜 이런 곳이 있을까, 혹시 우배가 꾼 꿈을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관객은 우배를 따라 비이성적인 미로 같은 공간을 탐험한다.

공연 사진
공연 사진

<배우우배> 공연 사진

그래서 우배는 이 집에 안착하게 될까. 우배는 연기에 대한 욕망으로 현실에서 실종자를 연기하며 그의 가족이 낸 시험을 통과하게 된다. 가족들이 우배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극적인 성공 앞에서 우배는 실종자 마음을 이해하고 그의 심리에 가 닿게 된다. 이것은 우배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우배는 공연 즉 연기가 끝나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연극의 일회성은 살아있는 예술로서 연극의 고유한 특성이자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 때문에 허무주의로 흐르거나 복원이 어려우며 관객과의 만남에 있어 제한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과 연결된다. 하지만 실종자 마음에 가닿으며, 그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듯한 신기한 상태에 이른다.

그렇게 믿음을 회복한 우배는 광기로 가득 찬 집을 빠져나와 다시 극단으로 돌아온다. 연기를 멈추고, 그의 현실로 되돌아온 것이다. <배우우배>는 연극 장면을 연습하는 어느 극단 모습에서 시작했다. 마무리도 다시 연극 장면을 연습하는 사람들 무리다. 우배 현실은 화려하고 환상적인 공간과 전혀 다르지만, 이곳에 돌아온 우배 입가에는 웃음이 머물러 있다. 우배는 방황을 통해 그만의 답을 얻었다.

이미지 출처: 극단 십년후

엄현희

엄현희

연극평론가. 인터뷰모음집 『이머시브 씨어터:창작경험의 공유』(2022), 연극평론집 『연극비평과 연극경험』(2020), 『기록,성장,연극』(2018) 세 권을 책을 발표했다.